“잘 지내?”
“그럭저럭. 외롭긴 하지만.”
“누굴 좀 만나보든가.”
“그건 괴롭고 어려운 일이야.”
모처럼 집에 다니러 온 아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다. 속으로는 할 말이 많았으나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이미 독립한 자식을 붙들고 인생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충고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하는 일은 불안정하고 미래는 불투명해서 기운이 쭉 빠져 있는 N포세대에게는 더더욱. 아들이 돌아가고 난 뒤 깊숙이 넣어둔 말을 웅얼웅얼 곱씹을지언정.
여하튼간에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간은 그 ‘괴롭고 어려운’ 타인과의 사랑을 꿈꾼다. 일방적이 아니라 보상이 확실한 사랑. 누군가가 날 사랑해주길 원하므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처럼 사랑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불변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처럼 거룩하지 않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한다. 연인들이 매 순간 분리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본능적으로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기 때문이리라.
종족보존이라는 생물학적 접근방식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편을 확보하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지란지교를 꿈꾸는 이유도 내 편을 만들고 싶은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최종 목표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떠나지 않을 단 한 사람이다. 그러나 부모, 형제 또는 자매도 결코 최후의 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믿어온 친구도 때때로 아득히 멀고 낯선 존재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고, 그들의 판타지가 있다. 저마다 자기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들과 나 역시도. 서로를 염려하고 응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타인과의 관계는 연약지반에 올린 건물처럼 외부의 충격파에 취약하다. 때로는 삶 전체가 무너진다. 무너진 삶에 투입돼야 할 구조요원은 새로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자중자애,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자기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복구는 어렵다. 이 자기와의 연애는 나르키소스의 자기 찬미가 아니라, 돌보고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다. 생판 남과도 죽네 사네 하면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인 자기 자신과 알콩달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연애는 뜨거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설득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이 연애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흉흉한 세상에서 찢기고 베인 상처를 치유해주는 힘도 있다. 아들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죠. 오히려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문제가 되는 거고요.”
자기와 연애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청춘에게 ‘리틀 포레스트’를 참고하라고 권한 적이 있는데, 정작 아들에게는 말해주지 못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만화를 모리 준이치 감독이 영화화한 ‘리틀 포레스트’는, 내 식으로 말하면, 자중자애의 결정판이다. 사계절의 변화와 자연친화적인 일상의 순간순간을 섬세하고 끈기 있게 담아낸 화면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건드린 건 주인공의 삶의 방식이다. 혼자 농사를 짓고, 그렇게 거둔 수확물과 자연에서 얻은 재료들로 정갈한 밥상을 차리고, 서두르지 않고, 조리 과정을 건너뛰지도 않고, 완성된 요리를 예쁜 그릇에 담아내기까지… 그녀는 전 공정을 진중하고 정성스럽게 수행한다. 그것은 그저 한 끼가 아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사랑의 의식이다. 돌보고 책임져야 할 대상인 자신에게 충실함이며,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존중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누구나 사랑이나 우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잘 알아둬야 해. 진짜 필요한 건 자기 자신을 소홀히 다루지 않는 것이야.”
의기소침해 있는 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매사 시큰둥한 아들이 이 말만큼은 귀담아들어주면 좋겠다.
정길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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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