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군사당국이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남북 도로개설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2018년 11월 22일 도로연결 작업에 참여한 남북인원들이 군사분계선(MDL) 인근에서 인사하고 있다. | 국방부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다.” 판문점 선언은 기존의 북핵 협상 방식을 뒤집는, 한반도 평화 건설의 역사적 실험을 시작했다.
북핵 문제는 힘의 비대칭성과 역설이 복합된 난제다. 북한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 비해서도 절대적인 힘의 열세에 있다. 남북의 경제력 격차는 40배 이상으로, 한국의 군사비가 북한의 경제 규모를 상회한다. 북한의 핵탄두는 최대치로 추산해도 100여 기 정도인데 미국의 핵탄두는 6000기 이상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투자와 혁신 측면에서 어떤 경쟁자도 허용하지 않겠다(Outspend, Out-innovate)는 모토 아래 전면적인 핵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저발전 독재국가로 ‘불량국가’와 ‘실패국가’ 등 국제규범에 미달하는 ‘야만’으로 취급돼왔다. 하지만 한미와 국제사회는 북한이 핵이라는 비대칭 전력으로 무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재앙적 비용을 강제할 한반도에서 예방 전쟁 등 군사적 옵션을 제외하면 실제적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강압할 능력 또한 갖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절대적인 힘의 열세인 북한과 핵 협상에 나선 것이다.
북한의 ‘주동적 조치’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
기존의 전형적인 북핵 협상의 공식은 북한의 선(先)비핵화에 대해 경제적·외교적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2005년 9·19 공동선언은 1조에서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목표로 확인하고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 계획을 포기하고 비확산 체제에 복귀한다는 공약을 담고, 2조 이하에서는 에너지 지원, 양자 수교에서 동북아 평화체제까지 다양한 나머지 국가들의 보상 조치를 규정했다. 이에 반해 판문점 선언은 남북교류의 획기적 개선(1조), 군사적 긴장완화(2조)에 이어 한반도 평화체제(3조) 안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설정하고, 그 방법으로는 북한의 “주동적인 조치”에 따라 남북이 상호 간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국제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들고 있다.
판문점 선언은 북의 비핵화에 따른 평화 건설이 아니라 평화를 통한 비핵화,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남북관계 수립과 한반도 평화 건설에 내장된 북의 주동적인 조치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화한 것이다. 이 공식은 2017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개발에 성공한 북한의 ‘핵무력 완성’을 현실적 배경으로, 2018년 3월 한국 특사단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밝힌 비핵화 조건인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담보”를 만족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교착은 북핵 문제 비대칭의 산물
판문점 선언의 새로운 평화-비핵화 공식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9월의 평양 남북정상회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새로운 북미관계와 한반도 평화 건설에 이어서 판문점 선언에 따른 한반도의 비핵화와 미군 유해 송환에 합의했다. 평양선언 1조는 남북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려는 ‘판문점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포함했고, 2조는 남북교류를 강화하는 철도 연결,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경협의 전망을, 그리고 5조는 북한의 주동적 조치에 따른 한반도 비핵화의 새로운 단계로서 북한은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 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평양정상회담 이후 북미의 상응 조치-비핵화 협상이 교착되더니, 급기야 올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선비핵화 해법으로 선회해 일괄타결 ‘빅딜’을 요구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영변 핵시설 폐기에 대한 제재 해제 요구로 맞서면서 합의 없이 끝나버렸다. 이 교착을 돌파하기 위한 4월 11일의 워싱턴 한미정상회담도 3차 북미정상회담의 불씨는 살렸지만, 북미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몰딜’과 3차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도 ‘빅딜’까지의 대북제재 유지 입장을 견지하며 남북경협을 가로막은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연말까지 미국이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따른 3차 북미정상회담을 제안한다면 수용하겠지만 더 이상 제재 해제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협상의 공을 미국에 넘기고, 한국에게도 “오지랖 넓은” 촉진자나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 역할을 압박했다.
물론 남북미가 ‘쌍중단’(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활동과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을 동시에 중단하는 것)을 유지하면서 북미가 모두 정상 간 담판 형식인 톱다운 방식의 협상을 선호하고 한국에 촉진자와 중재자를 넘어 당사자 역할을 요구하는 현실은 과거의 ‘통미봉남’이나 전쟁 위기설에 비하면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교착은 구조적으로 북핵 문제의 비대칭성과 역설의 산물로, 결코 간단한 장애가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비판한 “적대적인 반통일·반평화 세력들”은 미국 패권과 한국 민주주의의 일부로 제도화돼 있다. 한미가 북한에 북한이 원하지 않는 비핵화를 강제할 수 없듯, 북한 역시 판문점 선언에서 시작된 새로운 평화-비핵화 프로세스의 조건인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폐를 한국과 미국에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이혜정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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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