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거리가 붉게 물드는 계절이다. 전국 어디를 가도 눈이 즐거운 때지만 대구의 10월은 듣는 즐거움까지 있다. 어느덧 열여섯 번째를 맞은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대구의 가을은 단풍이 아니라 오페라로 물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구의 가을과 오페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오페라 공연이 시작된 지 70주년을 맞는 해다. 오페라는 1948년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시공간에서 ‘춘희’가 무대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춘희’는 우리에게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로 더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이후 오페라는 우리나라 최초 창작오페라 ‘춘향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창작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1980~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유학파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오페라가 크게 발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 1 오페라 ‘콘체르탄테 살로메’ 공연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 2 대구오페라하우스 관객석 모습. ‘돈 카를로’, ‘라 트라비아타’ 공연은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대구오페라하우스도 우리 오페라사에서 큰 축을 맡고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긴 오페라 제작극장이다. 자체 극장을 갖고 작품을 기획·제작하고 유통까지 직접 하는 유럽식 제작극장 시스템을 도입해 우리 오페라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일조해오고 있다. 올해 오페라축제는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일대기를 그린 창작오페라 ‘윤심덕, 사의 찬미’,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의 오페레타(대사가 많고 화려한 춤이 등장해 오락성이 강하다) ‘유쾌한 미망인’, 마지막으로 ‘라 트라비아타’가 메인 오페라로 선정됐다. 올해 축제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돈 카를로’의 베이스 연광철, 소프라노 서선영, 테너 권재희, 바리톤 이응광 등 유럽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의 무대를 직접 볼 수 있는 공연이 기획되면서 전국 오페라 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3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4 ‘폐막 콘서트’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성악가들 ⓒ대구오페라하우스
이번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라 트라비아타’는 우리 오페라사에 의미 있는 작품이다. 1948년 ‘춘희’로 소개된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다. ‘라 트라비아타’는 향락과 유흥에 젖어 살던 사교계의 꽃 비올레타가 갑작스럽게 만난 진정한 사랑과 연인을 위해 희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축배의 노래’, ‘언제나 자유롭게’ 등 전주만 들어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아리아가 많다.
‘돈 카를로’, ‘라 트라비아타’ 전 공연 매진
‘라 트라비아타’는 오페라에서 보기 힘든 ‘피켓팅’이라는 수식어를 남겼다. ‘피켓팅’은 피가 튀기는 전쟁 같은 티켓팅이라는 뜻으로 열차표나 공연 관람권 예매 수요가 많아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10월 19일, 20일 이틀간 열린 공연에서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전석이 매진됐다. 어쩌다 취소표가 생겨도 바로 사라졌다.
▶ 1 대구 동구 롯데아울렛에서 열린 광장 오페라 ‘라보엠’ 공연 모습
2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관 토크 콘서트’
3 대구 지역 곳곳에서 열린 ‘찾아가는 오페라 산책’ ⓒ대구오페라하우스
‘라 트라비아타’뿐 아니라 개막작인 ‘돈 카를로’도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이번 축제의 메인오페라 4개 작품의 객석 점유율은 93%. 지난해 메인오페라 4개 작품의 평균 객석 점유율이 77%였던 것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다. 개막작 ‘돈 카를로’는 세계 최정상급 베이스 연광철,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수상한 소프라노 서선영의 출연으로 큰 화제가 됐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오페라 마니아를 위해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공연 실황을 중계하기도 했다. 국내외 전 지역 2만 4000여 명이 공연 실황으로 ‘돈 카를로’를 함께 감상했다.
‘윤심덕, 사의 찬미’도 두 차례 공연 객석 점유율이 각각 98%, 95%를 기록해 창작오페라로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공연 내용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탁계석 음악평론가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곡가 진영민의 원숙한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소극장 오페라 작품인 ‘버섯피자’, ‘놀부전’, ‘마님이 된 하녀’, ‘빼앗긴 들에도’도 평균 객석 점유율 91%를 기록했다. ‘마님이 된 하녀’와 ‘버섯피자’는 전 공연이 매진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번 축제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프로그램은 ‘광장오페라’였다. 대구 북구 삼성창조캠퍼스 야외광장, 대구 동구 이시아폴리스 롯데아울렛 등에서 오페라 ‘라 보엠’ 2막 부문 공연이 열렸다. 가을밤 야외에 울려 퍼지는 아리아는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시민 대부분이 “공연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고 말할 만큼 호평을 받았다. 광장오페라뿐 아니라 다양한 이벤트도 열렸다. 대구 동구 동대구역, 대구 수성구 삼성라이온즈파크, 대구 수성구 대구스타디움 등에서 열린 ‘프레 콘서트’, 오페라 산책,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관 토크 콘서트’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오페라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10월 21일,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메인 공연장인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찾았다. 10월 중순에 접어든 대구는 이제 막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모습이었다. 지난 여름 잔혹했던 무더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선선한 날씨라 가을을 만끽하러 나온 시민들의 표정도 밝았다. 폐막 콘서트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공연장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공연을 볼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 포스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 4 대구 북구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프레 콘서트’에서 관객들이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오페라축제의 마지막은 오페라의 유명 아리아를 들려주는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오페라가 시작되기 전 관객석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보니 대구 시민의 오페라 사랑이 실감났다. 공연 정보가 적힌 팸플릿을 보고 있는 관객에게서는 학구열마저 느껴졌다. 공연장에는 드문드문 외국인 관객도 눈에 띄었다. 이날 폐막식 콘서트에서 지휘를 맡은 리신차오의 무대를 보러 온 중국인 관객뿐 아니라 캐나다에서 여행을 왔다는 관객도 있었다.
콘서트가 열리기 전 ‘윤심덕, 사의 찬미’에서 김우진 역을 맡았던 테너 노성훈 씨를 만났다.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이번 축제를 회상하면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오페라 공연이 열린 곳이라 그런지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부터 남다르다”며 말문을 열었다. 또한 “한 극장에서 한 달 동안 올린 네 작품이 매진되기가 쉽지 않다. 유럽에도 이런 경우는 잘 없다. 그만큼 대구 시민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윤심덕, 사의 찬미’ 공연 후일담도 들려줬다. “창작오페라는 준비기간이 기존 작품보다 두 배 이상 더 걸린다. 연출, 지휘, 음악, 제작 모두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라 막막하고 힘들었다. 의견 대립도 간간이 있었지만 이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합을 잘 맞춰서 뿌듯하다. 힘든 만큼 보람이 있었던 작품이라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폐막 콘서트는 총 2부로 이현주 KBS 아나운서가 진행했다. 한국인 최초로 베로나오페라페스티벌에서 주역을 맡아 화제가 된 소프라노 임세경과 바리톤 고성현, 우주호, 강형규, 김동섭, 한명원으로 구성된 ‘THE TONES 5(더톤즈파이브)’, 테너 박신해, 노성훈, 김동녘으로 구성된 ‘ROMANZA(로만짜)’가 무대에 올랐다. 오페라 ‘팔리아치’의 아리아 ‘여러분 한 말씀만 드려도 될까요?’로 시작한 콘서트는 ‘아이다’, ‘리골레토’, ‘라보엠’, ‘나비부인’, ‘카르멘’의 주옥같은 아리아 18곡이 이어졌다.
1부 공연이 끝난 후 오페라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오페라대상은 ‘돈 카를로’의 필리포 2세 역을 맡은 베이스 연광철이 수상했다. ‘돈 카를로’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고 연주시간이 길어 흥행이 쉽지 않았는데 연광철의 출연으로 큰 관심을 모아 축제의 성공에 이바지한 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가수가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슬픈 선율이 울려 퍼지는 곡이 나오면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는가 하면 경쾌한 곡이 나올 때는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기도 했다. 마지막 곡 ‘카르멘’의 ‘투우사의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는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콘서트 무대에 섰던 가수들이 모두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서로 멜로디를 주고받으며 팬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아 가수들이 두 차례 더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에 힘입어 앙코르 공연을 더 했지만 떠나갈 듯한 함성은 잦아들지 않았다. 축제의 끝은 그렇게 다가왔다.
폐막 콘서트를 관람한 서승현 씨는 “올해 축제는 출연진이 훌륭해서 한 공연도 놓칠 수 없었다”며 “마지막까지 귀가 즐거운 공연을 관람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경남 진해에서 온 안유희 씨는 “지역에서도 이런 문화행사가 꾸준히 열려서 좋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수준 높은 문화행사가 계속 열리면 좋겠다”고 전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오페라 공연은 계속된다. 11월에는 ‘푸치니 갈라콘서트’가, 12월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 오페라 ‘라보엠’ 공연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