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아빠가 선물해주신 인형이에요. 솜이 오래돼서 모양이 망가졌는데 TV에서 인형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찾아왔어요. 제게 인형은 매일 안고 자는 편안함을 주는 존재인데 다시 건강한 모습을 회복하게 돼서 너무 기뻐요.”
직접 곰인형을 들고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토이테일즈를 방문한 강지희 씨는 상담을 나눈 후 만족감을 드러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원래 모습을 잃어가는 인형을 보며 자신의 추억까지 버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인형병원을 만나게 돼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 토이테일즈 김갑연 대표가 직접 출시한 캐릭터 인형인 ‘줄루’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C영상미디어
토이테일즈는 국내 유일의 인형병원이다. 김갑연 대표는 추억이 담긴 인형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병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소개했다.
“사람이 아플 때 병원을 찾는 것과 똑같아요. 눈이 아프면 안과, 피부가 벗겨지면 피부과, 근육이 틀어지면 정형외과, 얼굴을 복원할 땐 성형외과에 가잖아요. 인형도 똑같아요. 아픈 부위에 맞게 전문의사들이 수술을 해줘요.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상태가 나쁠 땐 복제를 합니다.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디자이너들에게 ‘치료사’라는 이름을 붙여서 인형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토이테일즈 사무실의 절반 이상은 인형들의 치료와 수술이 이루어지는 작업실이다. 빼곡하게 쌓여 있는 각종 원단부터 다양한 인형 재료까지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전문기술자 여섯 명이 각자의 영역에서 인형 수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인형병원의 치료 과정은 일반 병원과 똑같다. 아픈 아이가 병원을 찾으면, 어디가 아픈지 살피고 그에 맞는 치료를 진행하듯 인형도 수선할 곳을 꼼꼼하게 점검한다.
“디자이너 팀장이 틀을 만들면 각 부위에 맞는 원단을 찾아서 시술에 들어갑니다. 재봉 전문가가 수선을 하기도 하고, 디자인 전문가가 복제를 위한 작업도 하고요. 다들 업계 경력이 오래된 분들이라 작업 과정이 숙련된 편이에요. 단순히 바느질 솜씨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단이나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에요.”
▶ 전문 숙련공이 재봉, 수선 등 인형의 상태에 맞는 작업을 진행한다.(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택배로 인형 수리를 의뢰한다.(아래) ⓒC영상미디어
숙련 치료사가 아픈 부위 맞게 치료
무역업에서 시작해 캐릭터 사업까지 폭을 넓히던 토이테일즈가 본격적으로 ‘인형병원’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지난 2016년이다. 국내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곳이다. 토이테일즈보다 먼저 일본에 인형병원이 있었고 지금은 호주, 미국, 포르투갈에도 있다.
이곳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수술은 한 달에 100건 내외. 가격은 1만 5000원부터 높게는 수십만 원에 이르기까지 시술 과정에 따라 다르게 책정된다. 김갑연 대표는 국내 인형 애호가들이 외국에 비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우리는 패밀리 문화가 발달해서 가족에게 애착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대가 바뀌면서 점점 인형이나 다른 대체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우리나라의 인형 수선 수준은 높은 편이다. 토이테일즈의 누리집(www.toytalez.com)과 트위터, 카카오톡에 올라온 치료 후기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 경험하신 분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서 국내뿐 아니라 외국 손님도 많은 편이에요. 외국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한국을 방문한 김에 의뢰하는 경우도 많아요. 일본은 우편접수만 진행해서 속도가 느린 편인 데다 수선 과정이 단순한 경우가 많아서 까다로운 작업이나 복제가 필요할 때 저희를 찾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치료 원칙은 꼼꼼함과 속도다. 인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객들 특유의 섬세함이 있어서 사전 조율 과정이 필수라고 한다. 그야말로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라서 택배보다 직접 방문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고객에겐 인형이 너무나 소중한 아이들이잖아요.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손때가 묻어 있다 보니 새로운 모습을 환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경우도 있죠. 사전 조율이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아이 대하듯 아끼는 마음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합니다.”
감성을 되찾는 작업
김갑연 대표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18년 전이다. 무역업으로 시작해 인형 생산, 캐릭터 발굴 등의 사업을 펼쳐왔고 최근 인형병원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
“5년 전부터 토이테일즈라는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어요. 주로 자체 개발한 캐릭터 인형을 다뤄요. 인형병원은 쇼핑몰 사업의 일환이에요. 솜갈이 서비스를 무상으로 해주다가 다른 곳에서 구입한 인형도 수선이 가능하냐는 고객들의 요청이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병원이라는 이름을 달았죠.”
김 대표가 인형병원에 중점을 주게 된 데는 아이돌 팬덤 문화도 한몫했다고 한다. 중국 팬들이 아이돌 멤버를 인형으로 200~300개 정도 제작한 적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형이 망가지자 수선을 요청한 것이다. 인형이 복원되는 내용이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고, 트위터에 올라간 관련 영상은 조회수가 26만을 기록하기로 했다.
“인형은 아이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30년 전에 선물 받은 때 묻은 인형을 들고 찾아오는 고객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것을 들고 뭐하는 것이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형에 얽힌 추억뿐만 아니라 인형을 좋아하는 분들만의 감성이 있는 것 같아요.”
김갑연 대표는 인형을 생각하는 사람들 특유의 감성이 좋다고 한다. 생명이 없는 무언가에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감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본인이 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대부분의 고객들이 인형을 동반자로 생각하더라고요. 동생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친구일 수도 있고요. 특성상 원단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세월이 가면 낡을 수밖에 없잖아요. 더 훼손되기 전에 수술하고 치료해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과정이 즐거워요.”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커다란 여행가방을 든 여성 고객이 사무실을 찾았다. 며칠 전 수술을 의뢰한 인형을 데려가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깔끔하게 완성된 ‘아이’의 모습을 확인한 고객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감사를 표현했다.
“이럴 때 큰 행복을 느끼죠.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생명력을 넣어준 아이를 고객들이 행복하게 데리고 갈 때요.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까지 아름다워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인형 병원 치료 과정은…
“30년 전 아빠에게 선물 받은 인형을 복원하고 싶다”는 의뢰와 함께 인형 치료가 시작됐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얼굴과 팔, 다리의 상태는 양호하지만 솜으로 채워진 몸통 부위의 손상이 심각한 상태. 컨버스 천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달라는 요청에 맞춰, 디자이너가 최대한 똑같은 원단을 찾아 재단 과정을 거쳐 새 옷을 만든다. 몸통에는 새로운 솜을 채운 다음 팔다리를 연결해 새로운 인형이 탄생했다. 원단 등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최종 형태가 완성될 때까지 의뢰인의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작업을 이어간다.
임언영│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