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부터 어두운 얘기라 거론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을 잠시 했지만 축구계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숨김없이 말하겠다. 2018년은 여러 의미에서 한국 축구의 명운이 걸린 해라는 말이 축구계 안팎에서 심심찮게 제기된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 획득 이후 한국 축구는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얘기가 많았다. 단순히 기대에 못 미친 국제대회 성적에 한정한 얘기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한국 축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줄어들고 있음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땅을 붉게 물들이며 축구 열기가 휘몰아쳤던 2002년의 ‘특수’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 축구가 여전히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팬들에게 증명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분위기다. 그래야만 웃을 날이 많지 않았던 한국 축구가 마음껏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 2017년 12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아시아 축구연맹(EAFF) E-1 풋볼 챔피언십 2017 대회 시상식에서 장현수 선수가 트로피를 들고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연합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할 러시아월드컵
그래서 가장 주목하는 대회가 바로 2018 FIFA 러시아월드컵이다. 전 세계 예선을 거치며 본선에 오른 32개 팀이 8개 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를 치른 후 각 그룹 상위 두 팀씩 토너먼트에 진출해 챔피언을 가린다. 보통 월드컵이 열리는 해가 되면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향한 기대치가 상당히 커지기 마련인데, 애석하게도 러시아월드컵을 앞둔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럴 만하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A 대표팀은 본선 32개 팀 중 최하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별 리그에서 독일·멕시코·스웨덴이라는 뛰어난 실력과 전통을 자랑하는 강호들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1986 멕시코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이래 이 정도로 험난한 대진을 받은 건 손에 꼽을 정도이기에, 내부에서도 16강 진출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비관적 전망이 가득하다. 이른바 ‘객관적 전력’이라는 잣대에서 한국이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팀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 신태용 감독이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콜롬비아, 세르비아와의 평가전에 나설 대표팀 선수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축구대표팀이 중국과 예선 경기를 하루 앞둔 2017년 3월 22일 중국창사 허룽 스타디움에서 훈련하고 있다 ⓒ연합
하지만 그렇다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식으로 임해서는 곤란하다. 월드컵은 단순하게 객관적 전력이라는 잣대가 그대로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 때 잉글랜드·이탈리아·우루과이 등 소위 ‘월드컵 챔피언’들과 한 조를 이루고도 경쟁자들을 모두 따돌리고 8강까지 내달리며 자국민들을 열광에 빠뜨렸던 코스타리카의 사례가 한국을 통해 되풀이될 수도 있다. 상대의 뛰어난 실력을 존중하되, 아직 휘슬이 울리지 않았으니 지레짐작에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한국은 오는 6월 18일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과 첫 대결을 펼친 후, 엿새 후 로스토프로 이동해 ‘북중미 맹주’ 멕시코와 두 번째 경기를 치른다. 세계적 강호이자 브라질월드컵 챔피언인 독일을 상대하는 경기는 6월 27일 카잔에서 벌어진다. 시쳇말로 ‘도장 깨기’인 듯한 대진이지만 월드컵은 늘 어려운 무대였다는 점을 감안하고 과감하게 부딪쳐야 한다. 비록 험난한 도전이긴 해도 신 감독을 비롯해 선수들 모두가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축구계 안팎에선 최근 국가대표 선수들의 자세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국가대표팀은 그 나라 국민에겐 선망의 대상이며, 한국 축구의 발전을 이끌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데도 그저 ‘운동’ 또는 ‘경기’라는 단순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한국 축구는 국가대표팀과 프로축구 할 것 없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러시아월드컵은 반전의 계기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성적이 꼭 필요하다. 위기의 한국 축구를 일으키기 위해 뭔가 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이는 대회에 임하는 중요한 동기 부여 요소가 될 수 있음이 자명하다.
버려진 세대의 부활, 가능할까
2018년에는 단순히 월드컵만 있는 게 아니다. 신태용호에 가려 아직 주목받지 못하는 팀이 있다. 바로 김봉길 감독이 이끄는 한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김봉길호는 1월 중국에서 열리는 2018 AFC U-23 챔피언십에 출전한 후 오는 9월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열리는 2018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4년 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이광종호가 뛰어난 경기력으로 금메달을 안겼던 기억을 재현하라는 특명을 받은 팀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전력상 한국이 가장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는 대회라는 점에서 러시아월드컵과는 접근법이 다를 필요가 있다. 디펜딩 챔피언이자 강자로서 자세를 갖추고 토너먼트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승리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 2017년 11월 5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의 경기 ⓒ연합
그런데 이 팀은 역대 아시안게임 대표팀 중 특이한 점이 있다. 이른바 ‘골짜기’ 또는 ‘버려진’ 세대라는 점이다. 두 살 터울 형들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을, 두어 살 아래 동생들은 2017 FIFA U-20 월드컵 코리아에 출전해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지만 이들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U-20 대표 시절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아예 세계무대와는 인연을 맺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령대 선수들은 꾸준히 각급 연령별 대표팀에 소집되어 발을 맞췄지만, 이들은 과거 예선 탈락이라는 큰 상처를 입은 후 도전할 대회가 없어 이번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아예 한자리에 모일 기회마저 없었다. 설움을 가득 느낀 선수들이 모인 팀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김봉길호의 승조원들은 단순히 국제대회 출전을 앞둔 팀이라고 마름질할 수 없다. 한국 축구를 아시아 최강자의 자리에 곧추세우는 건 당연하고, 크게 구겨졌던 자신들의 자존심까지도 만회하길 열망한다. 가장 빛을 못 본 세대이지만, 그래서 가장 의욕이 넘치는 팀이라 할 수 있다. 김봉길호의 도전을 눈여겨봐야 할 가장 큰 이유다.
여기에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한국 축구계에 큰 화젯거리를 안길 팀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아시안게임은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23세 이하 선수들이 출전하는 연령별 대회다. 그렇지만 연령과 상관없이 세 명의 와일드카드 선수를 소집할 수 있다. 와일드카드에 어떤 선수를 부를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며, 특히 토트넘 홋스퍼에서 맹활약 중인 손흥민이 대회 금메달을 통해 병역 특혜를 받을 수 있을지에 세간의 관심이 몰리고 있다. 김 감독은 이미 와일드카드에 대한 구상에 돌입한 상황이다. 과연 주가를 드높이고 있는 손흥민을 비롯해 현재 한국 축구를 이끄는 스타 선수들이 조국에 금메달을 안기고 축구 선수 커리어를 더 크게 발전시켜나갈 기회를 잡을지 주목된다. 이는 대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축구팬들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슈라는 점에서 내내 큰 화젯거리를 양산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 낭자의 도전과 K리그의 아시아 제패
이밖에도 중요한 대회가 상당히 많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은 2019 FIFA 프랑스 여자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이 걸린 2018 AFC 요르단 여자 아시안컵에 출전한다. 총 8개 팀이 출전하는 아시안컵에서 상위 5위에 들어갈 경우 월드컵 출전권을 얻을 수 있다. 언뜻 ‘반타작’만 하면 세계 대회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냐며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 2017년 12월 15일 일본 지바현 소가 스포츠파크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 여자부 한국 대 중국 경기에서 한국의 이민아가 슛을 시도하고 있다. ⓒ연합
한국은 대회 B조에서 일본·호주·베트남이 있는 조에 속해 있다. 객관적 전력상 일본과 호주가 한 수 위라 평가받는 만큼 무조건 대회 티켓을 얻을 수 있는 조 2위 내 입성은 쉽지 않을 예정이다. 조 3위가 되더라도 티켓 한 장이 걸린 5위 결정전에 임할 수 있긴 한데 A조에 속한 중국 또는 태국의 전력이 만만찮은 만큼 방심은 곤란하다. 한국은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2017 EAFF E-1 풋볼 챔피언십에서 3전 전패를 당하며 최하위에 그치는 아쉬움을 맛본 바 있는데, 당시 이민아의 분투를 제외하면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한 바 있다. 이를 철저히 보완해 4월에 열리는 요르단 여자 아시안컵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무대에 도전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K리그 역시 주목해야 할 무대다. K리그 클래식에선 12개 팀이, K리그 챌린지에서는 10개 팀이 우승과 승격 또는 리그 잔류를 위해 사투를 벌일 예정이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지난 시즌 우승팀 전북 현대가 가장 눈여겨볼 만한 팀이지만, 올해는 울산 현대 등 다른 강호들이 전북의 아성을 넘기 위해 의욕적으로 전력을 보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최근 몇 년과는 다른 양상의 경쟁이 펼쳐질 공산이 크다.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대회는 K리그를 대표해 나서는 4개 팀의 아시아 무대 도전이다. 2018 AFC 챔피언스리그에 전북을 비롯해 울산·수원 삼성·제주 유나이티드가 한국 프로축구의 자존심을 걸고 대회에 출전한다. 급성장 중인 중국 슈퍼리그를 비롯해 여타 아시아 국가들의 프로축구 수준이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어 과거처럼 손쉽게 우승을 넘볼 수 있는 대회는 아니다. 허나 여전히 전력적인 측면에서 K리그 클럽들은 아시아 최고 수준을 다투고 있는 만큼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전혀 없다. 2016 시즌 전북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2년 만에 다시 트로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월드컵 또는 아시안게임에서 노리는 호성적만큼이나 팬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김태석│베스트 일레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