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할아버지도 6·25전쟁 중이던 1950년 함경남도 북청을 떠났다. 하지만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과 친척 절반 이상이 고향 북청에 그대로 남겨졌다. 68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북한에 남겨진 부모님과 형제, 친척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속만 태우며 수십 년을 살고 있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 김경재 할아버지 ⓒC영상미디어
김 할아버지 역시 북한에 두고 온 누이동생과 사촌이 고향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1950년 겨울 피난길에 올라 남한으로 내려온 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던 1990년대 중반 누이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이 잠깐이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북한 출신 사람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한 적이 있었다”며 “이때 미국에 살던 고향 선배 한 명이 북한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사촌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알려줬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지인이 가져다준 누이동생의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몇 번 기절했을 만큼 울었다. 더구나 사진 속 누이동생이 자신이 북한을 떠날 때까지 살던 고향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더욱 메어왔다. 김 할아버지는 “동생이 68년 전 살던 옛날 집 대문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며 꿈인 것 같았다”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라도 보내기 위해 거주지를 일본으로 옮겨 생활하기도 했다. 또 동생 소식을 듣기 위해 중국을 찾기도 했다.
혹시라도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싶어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에도 신청을 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에게 동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껏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 손에 넣을 수 있는 동생 편지를 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10대 중반 정도의 나이는 돼야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여든 살에서 아흔 살이 넘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령인 실향민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래도 죽기 전에 고향에 한 번 가봤으면, 그리운 가족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을 위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했다.
김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반복돼왔던 것처럼 매우 적은 수로 제한된 이산가족 대상으로 북한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정도를 넘어서는 논의가 됐으면 좋겠다”며 “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워하던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했다.
조동진│위클리 공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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