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정정화 애국지사
“여든여덟 나이.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나이이고 늙은 몸뚱아리지만
아직도 정신 하나만은 칠흑의 밤 압록강에 거룻배를 띄우고,
대륙의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 위에서 목선 난간에
기대어 있을 적과 한 치의 다름이 없다.
이 나라 격변기 역사의 한 줄기를 국외자로서가 아니라
바로 그 현장, 그때 그곳에서 참여자로 지켜보고 이끌어온
이 사람이 역사 앞에 서서 침묵으로 대변하는 말마디 속에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너무나 많은 역사의 찌꺼기들이 들어 있다.”
<장강일기> 중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리는 정정화(1900~1991) 애국지사. 우리 역사의 격동기인 근현대사의 한 자락에 서 있었던 그녀는 1919년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상과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열악했던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섯 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해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부끄럽다고 했다. 수많은 독립투사와 생존을 같이하면서 그분들의 비장한 마음가짐과 변치 않는 애국심을 바라보았기에 ‘나는 그렇게 임시정부와 함께, 임시정부의 식구들과 함께 먹고 잠자고 일했을 뿐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활동을 축약했다.
정정화(본명 정묘희)는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의 일생이 바뀐 계기는 혼인이었다. 당시 조혼 풍습으로 만 10세의 이른 나이에 김가진의 장남 김의한과 혼인했다.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충청도 관찰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했다. 국권을 상실했던 1910년 이후에는 일본 정부가 수여한 남작을 반납한 뒤, 대동단 총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었다. 남편 김의한도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동단의 일원으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애국단원을 거쳐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1932년 5월 중국 자싱의 은신처에서
스스로는 독립운동 내세우지 않아
정정화는 어떻게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을까? 앞서 언급했듯 급박했던 시국을 좌시하지 않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영향이 컸다. 독립운동가 집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기에 가녀린 새색시는 나라를 생각하는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정화의 삶이 변화를 맞은 것은 1919년이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3·1만세운동과 일제 침탈에 저항하는 항일투쟁의 확산, 그리고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의 갑작스러운 망명은 그녀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신한민보> 12월 2일자에는 시아버지의 상하이 망명 기사가 보도되었다. 갑자기 전해진 망명 소식에 나라를 걱정하며 한숨짓던 시아버지와 그 뜻을 함께한 남편이 떠올랐던 정정화는 친정아버지와 상의해 거금 800원을 가지고 상하이로 향했다. 서울역을 출발해 의주역을 거쳐 국경인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의주역에서 펑톈(선양) 가는 기차를 타고 철교를 건너야 중국에 들어설 수 있었다. 펑톈에 도착한 뒤에는 다시 산하이관과 톈진, 난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1월 중순에야 상하이에 도착했다. 무작정 나선 길로 상하이에 도착해서 조선인 거주지를 묻기를 여러 번, 우연히 손정도 선생과 만났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달려온 먼 길은 이후 정정화가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경로가 된다. “왜, 어떻게 찾아왔느냐?”라는 시아버지의 물음에 그녀는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 허락도 없이 찾아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김가진은 용기 있는 며느리를 기특해했다. 기쁨도 잠시, 정정화가 마주한 임시정부의 상황은 너무 열악했다. 식사도 힘들 만큼 임시정부 요원들의 생활은 궁핍했고 그 가운데서도 독립 의지는 강건했다.
열악한 임시정부 상황을 지켜본 정정화는 독립자금 조달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했다. 상하이 귀환의 모든 경로와 절차는 임시정부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여자이기에 일제의 감시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없을 거라며 시작한 독립자금 조달은 여섯 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들며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밀 연락소에서 지하요원을 만났고, 독립자금 전대를 가슴에 품고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일도 마주했다. 그리고 검문, 검거, 심문을 당하면서 공적 임무도 쉼 없이 수행했다. 그렇게 본인이 보고 듣고 겪고 배우고 버텨낸 과정과 임시정부 청사가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마련되기까지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김의한, 정정화, 김자동(맨 왼쪽부터)
여성으로, 어머니로 “맡은 일 해”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 가운데 여성도 시대를 방관하지 않았다. 또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감시를 피해 다녔던 임시정부의 고단한 여정 속에 여성은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었고, 축 처진 어깨에 힘을 싣는 어머니로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장강일기> 중에서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임시정부는 압도적인 일본군의 무력에 대응해야 했다. 1938년에는 청년 이운환이 백범 김구를 비롯해 유동열, 이청천 등 임정 요인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수난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과 피란, 투쟁은 이어졌다. 그리고 상하이,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등을 거쳐 충칭에 이르는 긴 여정 속에 임시정부는 견디고 버텨냈다. 그 가운데 임시정부의 여성들은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결성을 계기로 1940년 6월 17일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립했는데, 정정화도 적극 참여했다.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등장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고난과 함께하며 조국광복을 위한 이들의 대열에 서 있었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깊지 않았다. 정정화, 그는 임시정부의 고된 행로와 끊임없는 독립투쟁 과정에 서슴없이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였다. 시대의 아픔을 소리 없이 품어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기억되는 정정화의 회고를 통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여성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존몰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회고록 <녹두꽃> 서문 중에서
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