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호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대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무얼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해서 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 주어진 시간을 성실히 사는 모범생으로 10대를 보내다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가니 자유라는 게 생겼다. 그때는 내게 주어진 자유가 버거웠다. 학교에 앉아서 공부만 하다가 나온 세상이 두렵기도 했다. 수업 외에 남는 시간 동안 무얼 할지 고민하다가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처음 올랐던 무대는 나에게 아주 강렬한 느낌으로 남았다. 무대 위에 올랐을 때의 짜릿함, 생생한 현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대에 서는 직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알게 된 일이 ‘모델’이다. 모델이 하는 일을 찾아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때 눈에 띈 게 ‘슈퍼모델 선발대회’다. 모델로서 훈련도 지식도 없었지만 그저 무대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만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입상할 것이라는 기대 또한 전혀 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TV 생방송 무대에 진출해 입상까지 했다. 에이전시를 만나 모델로 계약을 했지만 모델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 모델 일은 그저 간간이 하는 아르바이트였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모델이 가져야 하는 감성이나 느낌을 찾는 과정이 어려웠다. 다른 모델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것은 공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몇 년 동안 쌓은 경험과 시간을 짧은 시간 안에 따라잡아야 하는 것이 버거웠다. 촬영을 나갈 때마다 기자나 사진작가에게 혼쭐이 났고 그런 날은 울적한 마음에 혼자 숨어서 울기도 했다.
그러다 ‘장피 화보’를 찍자는 제안을 받았다. 장피 화보는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장의 사진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화보다. 신인 모델에게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다가온 기회를 꽉 잡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사실 이 화보를 찍었을 무렵을 떠올리면 어떻게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워낙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정신없이 촬영했던 기억밖에 없다. 그런데 인쇄된 책을 손에 받아든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잡지에서 본 나는 매일 거울로 보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런 포즈와 표정이 내 안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분되고 기뻐 화보가 닳도록 보고 또 봤다.
이 화보를 계기로 모델 일에 흥미가 생겼다. 다른 누구보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화보에 담기는 모습뿐 아니라 쇼 무대에서 느끼는 생생한 현장감 때문에 나는 점점 모델이라는 일을 사랑하게 됐다. 그 이후 국내를 넘어 해외무대에 진출하게 됐고 ‘이현이’라는 이름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좌절과 절망감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비할 수 없는 많은 기회가 다가왔고 크나큰 성취감을 안겨줬다. 내게 모델일은 삶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스승이다. 모델로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척 행복하다.
ⓒ노앙
이현이│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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