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우편으로 새 달력을 보내왔다. 2019년. 손가락으로 네 개의 숫자를 더듬어본다. 약간의 파동이 인다. 문득, 어려서 들은 우화가 떠오른다.
뜨거운 열기가 한풀 꺾인 늦여름 어느 날. 베짱이와 하루살이가 우연히 만나 서로 친구가 되었단다. 마침내 날 저물어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베짱이가 하루살이에게 말했다지.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서 놀자꾸나.” 하루살이는 의아했겠다. “내일이라고? 내일이 뭔데?”
가을날, 베짱이는 풀숲을 뛰어다니다 산에서 내려온 토끼와 친구가 되어 여러 날 잘 놀았단다. 찬바람 불고 서리 내리자 토끼가 제 굴로 돌아가며 베짱이에게 작별인사를 남겼다지. “베짱이야, 만나서 반가웠어. 우리 내년에 다시 보자꾸나.” 베짱이는 오들오들 떨며 되물었겠다. “내년이라니? 대체 내년이란 언제를 말하는 거지?”
하루살이에게는 단 하루가, 베짱이에게는 한 계절이, 토끼에게는 기껏해야 일고여덟 해가 지상에서 주어진 시간의 전부다. 어려서 처음 이 우화를 들었을 땐 그 깊은 함의를 헤아리기도 전에 제 삶의 길이만을 표준으로 아는 미물의 존재관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니까, 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과 생을 대하는 겸허함이 같은 의미임을 깨우치지 못하던 때.
인간의 관점에서야 하루살이의 하루는 물리적 1일에 불과하겠다. 하지만 그 1일을 위하여 잠잠히 기다린 시간은 오백 배, 천 배나 된다. 하루살이의 유충은 장장 1~3년을 물속에서 지내며 25회나 되는 탈피를 거듭한다. 마침내 성충이 되어 물 밖으로 나온 하루살이는 전력을 다해 생명의 춤을 춘 뒤 장렬히 스러진다. 하루살이로서는 전 생애를 건 비행이었으리라. 하루살이의 하루는 인간의 80년, 100년과 동등하다. 그 시간의 무게를 어찌 가볍게 여기랴.
해가 지고 달이 지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내게도 한 해 두해, 감히 연륜이라고 말하고 싶은 세월의 더께가 쌓였다. 이제는 단 하루가 되었든, 한 계절이 되었든, 몇몇 해가 되었든 목숨 붙은 존재의 엄중함을 모르지 않는다.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또,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더 현명한 것이 아님을, 안다고 생각해온 것이 실은 착각일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제 새삼 새 달력을 넘겨보며 가슴 서늘해지는 것은 여태껏 살아오고도 전 생애를 건 치열함을 내면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일 테다. 전투적으로 살았던 마크 트웨인조차 죽음에 이르러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메시지를 남겼지 않은가. 그야말로 하루살이처럼 눈 깜빡하는 새, 베짱이처럼 빈둥빈둥하는 새, 한 해가 훌쩍 달음박질치고 새해가 훅, 눈앞에 다가들었다. 이제야 지조 없이 갈팡질팡했던 2018년의 대차대조표를 펼쳐본다.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아니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이 미진함이라니…….
떠밀지 않아도 오늘은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내일은 온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 매일매일 하루살이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발밑의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다. 해돋이의 행렬에 휩쓸리지 않더라도 2018년과 2019년의 교대식을 앞두고 초 한 자루쯤 밝혀도 좋겠다. 나날이 생의 첫날이게 하소서. 오늘 하루가 생의 전부인 듯 살게 하소서. 그렇게 빌어도 좋겠다.
정길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