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배창호와의 인연을 말하려면 부득이 몇 줄도 안 되는 나의 이력을 적어야만 한다.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출생 직후부터 불행의 연속이었다. 생후 6개월 만에 아버지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무렵 결핵성 관절염을 앓던 나는 한쪽 다리의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장애인이란 놀림과 조롱을 받으며 종암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는 물론 삐끼, 건달 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 서울 대학로 방송통신대학 앞에 모였을 때의 사진이다. 왼쪽부터 배창호 감독, 소설 <만다라>의 실제 주인공인 현몽 스님, 이철용,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도수 스님이다. 평택 만기사 주지였던 원경 스님의 미놀타 카메라로 찍었다. ⓒ이철용
1970년대 말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등이 세상에 나왔고 문단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편지 한 장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쓴 <어둠의 자식들>이 100만 부나 팔리고, 후속작 <꼬방동네 사람들>도 베스트셀러가 되자 언론은 나를 주목했다. 게다가 이장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어둠의 자식들’도 관객 20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초특급 대박을 터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배창호 조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 책을 사들고 나를 찾아와 “<꼬방동네 사람들>을 내게 달라”고 했다. 나의 첫 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제작한 영화 스승 이장호 감독 아래에서 조감독을 했던 배창호가 독립하려는 것이었다.
1953년 대구에서 출생한 배창호는 1971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나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연극반에 들어가 배우 명계남, 신완수 프로듀서 등과 활동했다. 1977년 현대종합상사에 근무하던 시절 시나리오 ‘정오의 미스터 리’를 들고 이장호 감독을 찾아갔으나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묶여 있던 이 감독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78년 케냐 지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배창호는 당시 현지를 방문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이장호 감독의 금지처분을 풀어달라”고 간청했고, 그 직후 이장호 감독은 풀려났다. 귀국한 배창호는 이장호 감독이 풀려나와 처음 만든 ‘어둠의 자식들’에 조감독으로 합류했다.
이장호 감독의 화천영화사가 <꼬방동네 사람들>을 영화로 만든다면 원작료로 아파트 두 채 값인 1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참 감독 배창호에게 간다면 절반도 건지기 힘들었다.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나는 배창호의 영화 열정을 믿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배창호를 현진영화사 김원두 대표에게 소개해주었고,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이 영화는 살벌한 검열 때문에 ‘검은 장갑’이라는 가제목으로 촬영했는데, 사전 지적 사항이 67개나 되는 지독한 수정을 당한 뒤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원작 타이틀로 개봉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소매치기(안성기)가 사랑하는 여자 명숙(김보연)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배창호 감독과 함께 하월곡동의 산동네를 다니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안성기와 김보연 그리고 김희라를 주연 배우로 추천하기도 했다. ‘병신춤’의 명인 공옥진도 합류시키자고 해 당시 안성기와 같은 출연료 250만 원을 지급했다. 배창호 감독은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꿈에도 그리던 감독 ‘입봉’을 했다. 영화는 20만 명의 관객몰이를 했고, 배창호는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김보연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첫 작품 <어둠의 자식들>이 도시 룸펜들의 이야기라면, <꼬방동네 사람들>은 룸펜이 되지 않으려는 ‘하꼬방’ 달동네 사람들의 몸부림의 기록이다. 1980년대 초 한국 경제는 성장했지만 분배 문제로 양극화가 심화될 때 <꼬방동네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나눔’과 ‘분배’라는 말을 처음으로 떠올리게 했다.
이후 나는 빈민운동에 투신한 뒤 은성학원(야학) 원장,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 위원장, 평민당 도시서민문제특위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민당 도봉 지역에서 출마해 당선, 국내 헌정사상 첫 장애인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정계를 떠나 인생 상담소 ‘통’을 열어 개개인의 정체된 사주를 풀어주다 1996년 사단법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설립했다.
장애인들에게는 ‘사회복지’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문화예술을 향유할 권리, 다시 말해 ‘문화복지’도 필요하다.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가졌던 약자에 대한 작은 생각이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통해 ‘건강한 기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꿈을 주는 ‘희망 전도사’로 남고 싶다.
이철용│소설가,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