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먼 도시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이제 육교만 건너면 집이다. 그런 생각으로, 눈꺼풀에 내려앉는 육중한 피로감을 떨쳐내며 버스에서 내렸다. 패딩 코트에 목을 있는 대로 파묻고 육교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때쯤 그 남자가 보였다. 내가 사는 동네는 번화한 도심과 달라서 밤이면 상점가에 온통 불이 꺼지고 거리엔 인적이 뚝 끊어지다시피 한다. 그래서 컴컴한 어둠 속에 시커먼 형체가 보이면 본능적으로 무서운 마음부터 든다. 상대가 딱히 위협적인 몸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서 있는 자세가 이상하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허리 아래 오는 낮은 난간을 양손으로 붙들고 서서 다리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별 대수로울 게 없다. 이상한 점은 난간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 발은 멀쩡히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다른 한 발은 난간과 바닥 사이(그러니까 무르팍쯤에 오는) 틈새에 불편하게 걸쳐놓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머릿속에선 이 남자의 다음 동작이 그려졌다. 난간을 버팀목 삼아 상체를 일으키면 나머지 한 발도 난간과 바닥 사이의 틈새에 걸쳐지고, 그러면 난간 전체가 무르팍 정도에 오는 아슬아슬한 그림이 된다. 그 자세에서 상체를 아래로 숙이면? 머리칼이 쭈뼛 섰다. 이 남자,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정지 화면처럼 꼼짝도 안 했다.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육교 아래만 응시했다. 이래서야 그의 다음 행동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가 없다. 포즈가 다소 이상해 보이기는 해도 중년 가장이 늦은 퇴근길에 어둑어둑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단순히 고단한 일상의 회포를 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달려가서 “그러시면 안 돼요!” 할 수는 없다.
갸웃거리는 와중에 불쑥 한 명의 통행자가 텅 빈 육교 위에 나타났다. 잰걸음으로 그와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 육교를 내려갔다. 우습지만 그의 행동이 나의 섣부른(?) 염려를 ‘쿨’ 하게 가라앉혔다. 그래, 별일 아닐 거야. 너무 예민하게 보는 거야. 피곤한데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뭐하는 거야. 그를 그대로 지나쳐, 나도 육교를 내려왔다.
그런데 돌아서서 가는 마음이 영 찜찜하다. 할 도리를 안 한 것처럼, 떳떳지 못하고 속이 켕긴다. ‘에이, 이 아저씨가 정말….’ 걸음을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난간을 꽉 붙잡고 서 있다. 그가 미동도 없다는 사실에 돌아서긴 했지만, 그 사실이 나를 다시 한겨울 차가운 길 한복판에 멈춰 세웠다. 적어도 그가 여러 가지 망설임 속을 서성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휴대폰을 꺼내서 단호하게 버튼을 눌렀다. “경찰서죠? 제 위치 확인이 되시나요? 육교 위에 한 남자분이 난간을 잡고 서 있는데, 너무 오래 그러고 계셔서….”
경찰은 곧장 출동했다. 망설인 게 후회될 정도였다. 이상하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육교 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노라고 경찰관은 내게 말했다.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잘 들어갔을까? 다리 위에 서서 발아래 어둠을 응시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만지작거렸던 걸까? 내가 걱정하는 어떤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었다면, 다리 위의 이 해프닝이 그의 생각을 되돌릴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저씨, 나도 그런 거 해봐서 아는데요, 그런 생각은 바람 부는 다리 위에서 할 게 아녜요. 푹 자고 일어나 따뜻한 밥 한 공기 비우고 나면 그 생각도 달라져요. 별게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을 떠난 어느 시인의 시가 잠자리까지 따라오는 밤이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온전히 제 잘난 덕이 아니듯, 세상일이 마음먹은 방향과 엇박자로 펼쳐지는 것도 온전히 제 못난 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상당 부분 우연히 일어난다. 우리는 인생 앞에 더 겸손해져야겠다. 그리고 나쁜 계절을 통과하는 이웃들에게 더 자비로워져야겠다.
김은하│번역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