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는 늘 책이 있었다.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독서의 달을 맞아 자신의 삶과 함께한 책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전 전집으로 시작된 그의 서재는 그의 나이가 한 살씩 더해감에 따라 문학, 사회과학, 잡지, 소설, 시로 다양하게 변해왔다.
▶ 김용택 시인은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내고, 나도 모르는 세계에 가 있게 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조선DB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은 교과서 이외에 다른 책은 접한 경험조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섬진강변의 작고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집에서 50분 정도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다.
“도서관은커녕 책도 없는 환경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이웃에 있는 순창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제대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월부 책 장수가 왔어요.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팔러 왔더라고요. 책의 내용이 궁금하고 읽고 싶어서 산 건 아니고 예뻐서 그냥 사봤어요. 무심코 한 권 펼쳐서 읽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전집 7권을 다 읽었어요.”
책으로 세상을 경험한 시골 청년
방학을 보내고 다시 학교에 갔는데 그 책 장수가 또 책을 팔러 왔더란다. 이번에는 5권짜리 헤르만 헤세 전집이었다. 시골 청년은 이번에는 그 책에 푹 빠져 지냈다. 그렇게 그의 고전 읽기가 시작됐다. 앙드레 지드, 박목월 등 세계 철학사와 문학사의 전집이 자연스럽게 그의 서재로 들어왔다.
“어느 날 학교에 여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는데 학교 바로 옆에 집이 있었어요. 친구들이랑 선생님 댁에 놀러 갔더니 한국문학 전집 50권짜리가 있더라고요. 선생님이 안 읽으신다기에 제게 팔라고 했죠. 당시 6만 원이었는데 4만 원에 샀어요. 거긴 모든 장르의 작품이 다 있었어요. 밤을 새워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청년은 성인이 돼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20대 후반쯤? 전주에 가면 헌책방이 있어요. 책값이 너무 싸서 지게를 짊어지고 책을 많이 사 날랐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낑낑거리면서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큰 책방에 가는 것도 좋아했어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으니까 그곳에서 책을 읽었어요. 긴 작품은 못 읽으니까 주로 시, 월간지를 읽었어요. 주말에는 늘 서점에 붙박이로 있어서 직원들이 제가 가면 편하게 읽으라고 의자도 갖다 주고 빵도 주고 했죠.”
당시 그의 책장에는 잡지가 많았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 깊은 나무>, <월간 미술>은 당시 그가 꼭 챙겨서 보던 잡지다. 너무 재미있어서 창간호부터 꾸준히 사 모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살다 보니 책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게 됐어요. 나를 이해하게 됐고, 내 삶을 이해하게 됐어요. 책이야말로 인간을 잘 살도록 도와주는 것 같아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를 만드는 것, 그게 책이 아닐까요?”
그렇게 몇 년 책을 읽으니 생각이 많이 쌓였다. 문학청년은 넘쳐나는 생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본인도 모르게 글쓰기가 이어졌다.
“처음에 글을 쓸 때는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써요. 계속 쓰다 보니 내가 쓴 걸 내가 알겠더라고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쓰다 보면 남도 내 글을 이해하는 순간이 와요. 그래서 시인이 됐습니다. 책을 통해 시인이 된 거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한다
김용택 시인은 인생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인류는 모든 문제를 안고 사는 존재라 누구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능력을 어디선가는 얻어야 해요. 그 지혜를 삶 속에서 얻고 책 속에서도 얻게 되죠. 사람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이 정답을 가지고 거기 맞게 살 수는 없어요.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죠. 시야를 넓히면 지혜가 반드시 생겨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내고, 나도 모르는 세계에 가 있게 되는 것이 희망이라는 김용택 시인은 요즘 젊은 작가들의 책을 읽는 중이다. 분야를 가리지 않지만 아무래도 시집을 많이 읽게 된다.
“요즘 인상적인 젊은 작가가 많아요. 박준 시인의 작품이 재미있어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많이 알려졌고 최근에는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냈어요. 김민정 시인의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도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심보선 시인의 신간 <오늘은 잘 모르겠어>를 읽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글을 너무 잘 써요.”
김용택 시인은 ‘시인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해서 경험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전달자라고 한다.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진 만큼 시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를 두루 읽는다.
“요즘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에요. 저는 이 책을 특히 남자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책을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한 순간이 많아요. 아내와 딸도 단숨에 읽었는데, 아내에게 나는 어떤 남자로 비치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이 작품은 남성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잖아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어요.”
본인의 책 중에서도 한 권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작년 9월에 낸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를 꼽았다. 그중 ‘건널목’이라는 시는 아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라 애착이 간다고.
“책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돼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을 귀하고 소중하게 가꾸려는 노력을 삶과 독서 속에서 체득하면 우리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어머니께서 제게 늘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제’예요. 그게 답인 것 같아요. 인간답게 사는것, 그걸 위해서 책도 읽고 삶도 돌아보는 거겠죠.”
김용택 시인 추천 책, 책, 책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 문학과지성사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의 세 번째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와 <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대중과 문단의 주목을 한 번에 모아온 작가가 6년 만에 묶어낸 시집이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망한 소년에 대한 시, 쌍용차 해고 노동자 문제를 다룬 시가 눈에 띈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 민음사
2017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1982년생 김지영 씨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고백을 한 축으로, 고백을 뒷받침하는 각종 통계자료와 기사들을 또 다른 축으로 삼아 30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화제작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박준 | 난다
시인 박준의 첫 산문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시인이 자신의 시를 함께 읽어준 이들에게 보내는 한 권의 연서로 평가된다. 가난이라는 생활, 이별이라는 정황, 죽음이라는 허망, 우리들 모두에게 직면한 이야기를 호흡 가는 대로 담았다.
임언영|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