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67주년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됐지만 그 속에서 대한민국은 자유와 번영을 일궈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표현대로 ‘태극기 위에 위국헌신을 맹세한’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참전용사 이영철(93) 옹도 그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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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삼선리에 본부를 둔 교동파견대(배저대)는 대장 노재권, 교육대장 이영철, 공작과장 이강호, 별동대장 이광휘 등을 간부진으로 했다. 대원은 200여 명이었으며 여성 대원 20여 명도 있었다. 대원들은 황해도 이북이나 연백 출신으로 현지 실정에 밝았다.”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중 한 대목이다. 교동도는 강화도의 부속 섬으로, 전쟁 당시 적의 후방을 위협하며 첩보 수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전략 도서(島嶼)다. 책에 언급된 ‘교육대장 이영철’. 1924년생으로 올해 93세인 그는 67년 전의 6·25전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직 눈을 감을 수 없어요. 강화도, 교동, 백령도를 우리 유격대가 지켜냄으로써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고 NLL(해상의 북방한계선)도 있는 겁니다. NLL은 무명의 용사들이 쏟은 붉은 피로 만든 생명선이죠.”
그가 NLL을 ‘생명선’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6·25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은 서해 도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는 목숨 바쳐 서해 지역을 사수한 수많은 유격대원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KLO 첩보요원으로 두 차례 공중 낙하
6·25전쟁 발발 당시 개성에 살았던 26세 청년 이영철. 개성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개성’으로 남한 땅이었다. 부모님은 옷감을 생산하는 직조공장을 운영했는데 아버지는 마을 이장 일도 봤다. 5남 1녀 중 4남이었던 이영철은 부모님의 공장 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개성 시내 태권도장을 다니며 태권도와 유도를 배웠다. 그가 다닌 태권도장 주인은 민완식으로, 국회의원·문교부 장관·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개성 출신 정치인 민관식의 친형이었다.
의협심이 강했던 청년 이영철은 인민군 치하의 개성에서 ‘완장’을 찬 친구들이 태권도장 주인 민완식을 암살했다는 얘기를 듣고, 전쟁 직후 결성된 반공 청년대인 ‘혈투공작대’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이영철은 첩보요원으로서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개성 역무원으로 근무했던 동네 형에게서 ‘개성역 인근 터널 속에 인민군들이 폭탄과 실탄을 잔뜩 갖다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곧바로 혈투공작대장에게 보고했고 켈로부대(KLO·Korea Liaison Office·주한연락처) 지역 책임자까지 정보가 올라갔습니다. 며칠 후 터널 폭격이 있었어요. 미군 쌕쌕이(전투기 F-86F 세이버)가 터널 입구 쪽으로 날아가 기총사격과 폭탄을 투하하는 걸 직접 봤습니다.”
전쟁이 나고 3개월 뒤인 9월 서울이 수복됐고 10월 초 개성도 다시 남한 땅이 됐다. 이영철은 수복과 함께 군번도 없이 KLO 소속 선대(Sun-Net)에 입대했다. KLO는 1949년 미 극동사령부가 설치한 첩보부대로 유격전·첩보전을 총괄했다.
이영철은 서울에서 첩보요원 교육을 받은 후 1950년 12월 12일, 적지(敵地)의 정보 수집을 위해 황해도 황주에 공중 침투했다. 적지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투입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적지에서 명령 계통의 상관이었던 미 극동함대사령부 산하 제7함대 소속 유진 클라크 대위와 교신했다.
“같이 간 대원은 고향 후배 ‘이화중’이었어요. 우리 둘은 새벽 6시 30분경에 황주 논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의 업무는 황주 지역의 인민군과 중공군의 활동 상황, 보급로, 주둔지, 부대 이동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영철은 1950년 12월 27일 황해도 평산으로 이동한 후 상부에 적지의 상황을 재차 보고했다. 그런데 이날 무전기가 고장 나서 고립되고 말았다. 다행히 황해도 연백군 연안에서 지역 치안대 역할을 하던 해병특공대원을 만났다. 이영철은 해병특공대의 정보 수집 능력과 대원들의 용맹성을 목격하고 이 부대가 무기를 지원받으면 정식 유격부대로 충분히 전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영철은 당시 해병특공대장을 맡고 있던 김병식에게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전했다. 이영철은 1951년 1월 5일경 범선(帆船)을 타고 서해로 남하해 당시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로 가서 유진 클라크 대위 등 미군 정보장교에게 관련 상황을 보고했다.
“1월 7일로 기억합니다. 몇몇 미군 정보장교와 클라크 대위는 나를 보곤 무척 놀라워했어요. 죽은 줄 알았다는 겁니다. 적지 사정을 보고하면서 ‘향토 치안에게 무기를 제공하면 유격부대로서 큰 전과를 올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영철 대원의 정보 보고는 미군이 한국의 자생 유격대에 무기 등 전투 물자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1951년 1월 8일, 클라크 대위는 이영철 대원의 정보를 토대로 8군사령관에게 무기 공급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1956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실 연구팀이 작성한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유격전〉 보고서에 첨부된 ‘유격전 연표’에는 1951년 1월 8일 관련 정보를 입수했다고 적혀 있다.
식별번호 #469, 이영철의 존재 인정한 미군 기밀문서
첩보대원 식별번호 ‘#469’를 부여받은 이영철은 1951년 1월 13일 적지(황해도 연백)로 다시 공중 투입됐다. 함께 출동한 대원은 통신 담당 현역 군인 황해룡 하사였다. 둘은 1951년 1월 14일 새벽 1시경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벌판에 떨어졌다. 이영철 일행은 마을 주민을 포섭해 중공군과 인민군의 주둔지가 연백군 남산이라는 사실과 부대 규모를 상부에 보고했다. 그다음 날 미군 전투기 4대가 투입돼 적을 괴멸했다. 그 무렵 연백에 있던 KLO 동지들과 가족, 해병특공대가 인민군에 밀려 강화 교동도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영철은 곧바로 교동도로 건너가 해병특공대장 김병식과 일행을 다시 만났다. 조만간 무기가 공급될 것이라는 소식도 전했다.
이영철은 1월 24~28일을 전후해 상부에 여러 차례 무전을 쳤다. 교동을 사수하려면 지금 즉시 무기가 공급돼야 한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영철은 해병특공대와 주민이 먹을 음식도 부족하다는 내용을 미 8군에 전달해 식량도 지원하게 했다. 1951년 2월 클라크 대위는 이영철에게 장거리 무전이 가능한 무전기를 지급하며 “통신병과 관련 물자 보급을 확대, 지원할 테니 열심히 활동해달라”고 격려했다.
이영철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을지2병단 창설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1951년 3월경 미군의 지원으로 완전무장한 해병특공대는 을지2병단 유격대로 재편됐다.
이영철은 1951년 5월경 창설된 미 극동사령부 산하 제2정보사령부(제8103부대, 강화도 인근 불음도 주둔) 소속 교동파견대(배저대, Badger Net)에 배속됐다. 그는 배저대 교육대장으로 1954년 4월 제8103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근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주한미군 부대에서 근무한 이영철. 1961년 군사 정부가 들어선 직후 이영철은 병역 미필자로 지목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군번이 없으니 병역 기피자로 오해받은 겁니다. 다행히 내 공적을 확인한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었지만 군번 없는 용사로 살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어요. 증거가 될 만한 서류가 없었으니까요. 결국 1977년 호주로 이민을 갔죠.”
이영철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한국 정부로부터 ‘참전 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2013년 어느 날, 알고 지내던 국방부 소속 장교가 그에게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자료를 찾아보면 선생님한테 아주 중요한 문서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강화도, 교동도의 양민 학살 사건을 다룬 보고서였어요. 1951년 1월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며 내가 KLO 상부에 보고했던 사항을 토대로 미 극동사령부가 작성한 기밀문서가 보고서에 첨부돼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놀랍게도 첩보요원으로 부여받았던 식별번호 ‘#469’가 기밀문서 오른쪽 상단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지나서야 나의 첩보활동을 증명해줄 결정적 자료를 손에 쥐게 된 겁니다.”
KLO 첩보요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이영철 선생은 강화도, 교동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자생 유격대(해병특공대 등)가 미군의 지원을 받아 ‘육군 을지2병단’, ‘타이거여단’, ‘동키부대’, ‘울패부대’ 등 정식 유격부대로 확대·재편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첩보활동은 미 극동사령부가 서해 도서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영철 옹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대한민국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대한민국은 앞으로 잘돼야 하고 통일도 반드시 이뤄야 합니다. 국론이 분열되면 통일되기 어려워요.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사회적 갈등을 하루빨리 극복하고 통합된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백승구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