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잘 드는 서촌 자택에서 만난 시인은 보라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힐링 되는 기분이 들어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8년 만에 펴낸 시집 <반지하 앨리스>(민음사)의 표지 컬러도 보라색으로 골랐다. 세 번째 작가의 서재 주인공, 신현림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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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년 전부터 시가 많이 쏟아지더라고요. 세상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면, 돈이나 누리던 것들을 포기하면 ‘작은 집도 좋다, 반지하도 좋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 이번 시집에서는 ‘반지하 생활자의 행복’이라는 시가 그렇게 나왔죠. 반지하든 저택이든, 내가 어디에 머물든 괜찮아요. 현상이 아닌 본질을 꿰뚫고 가는 마음만 있으면, 인생의 힘든 것들이 괜찮아져요.”
흔히 신현림 작가의 시를 두고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녀는 그 혁명이라는 말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그 변화가 시라는 결과물을 만들고, 많은 독자가 그 시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번에 펴낸 <반지하 앨리스>에서는, 반지하에 불시착한 가난한 앨리스의 애환에 주목했다.
“시는 혁명이에요. 피를 흘리지 않는 사랑의 혁명이에요. 사랑이 혁명이 되면 세상이 달라져요. 시를 읽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채워져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시가 알려줘요.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는 게, 해와 달과 바람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것 아니겠어요?”
이번 작품집에서 애착이 가는 시를 꼽아달라니 시인은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사과, 날다’, ‘백 년 의왕 사람’ 등을 골랐다. ‘슬픔에 깊이 잠겨 봐야/ 백 년 인생을 알고/ 눈보라 치는 길을 가 봐야/ 추운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백년 의왕 사람’, ‘악수밖에 안 했는데/ 내 몸에서 살다 간 듯이/ 당신 손자국이 남았다’로 시작되는 ‘오늘만큼은 함께 있고 싶다’는 시는 직접 읽으면서 의미를 짚어주기도 했다.
그는 사랑을 주면서 떠나는 사람들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익명의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 희생을 했기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요? 저는 시를 통해서 내가 살면서 해야 할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었어요.”
신현림 작가는 시를 통해 그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시는 독자에게 건네는 사랑의 손짓이다. 시를 통해서 말을 걸고, 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본인의 시가 달라졌다고 신 작가는 말한다.
밑줄 친 책 다시 읽는 것 좋아해
신현림 작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영성 책을 늘 머리맡에 두고 읽는다. 책에서 얻는 생각은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이자 시를 만드는 훌륭한 재료가 된다.
“영성 책을 읽으면 내 마음 상태가 다스려지는 것도 있지만, 세상의 힘든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읽기도 해요. 살다가 ‘왜 살아 있나?’라는 질문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그 안에 있기도 하고요.”
새로운 책을 읽는 것보다는 과거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 읽는 것을 좋아한다. 시집부터 소설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다. 최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다시 읽었는데, 밑줄 친 대목이 눈에 띄더란다. 나이가 들면 망각이 시작되고 많은 것을 잊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축복을 맞기 위해서 그녀는 꾸준히 책을 읽는다.
“마르케스 좋아하고 도스토옙스키도 좋아해요. 주로 스케일이 큰 작가를 좋아하네요. 윤후명 선생님도 빠뜨릴 수 없고, 시인 중에서는 네루다를 좋아해요. 그의 시는 잉크가 아닌 피로 쓰였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에 공감합니다. 민족과 나라, 사랑, 인생을 관통하는 멋진 시를 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소설을 쓰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이 없대요. 모든 걸 시로 풀어내기 때문에요.”
신현림 작가는 꿈이 있다. 작가들이 머물다 간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 50여 개국을 다녀왔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지만, 아직 네루다가 살았던 남미는 가보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체취가 남은 러시아도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신현림 작가는 강연을 자주 다닌다. 꼭 해주는 말은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버림받는 게 아니라 지혜롭지 않아서 버림받게 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 씨가 제 산문집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를 들고 나와서 화제가 됐어요. 저는 사랑을 주는 법을 그 작품을 쓰면서 알았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하고, 길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말을 걸기도 해요. 과거에는 수줍음을 많이 탔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요.”
이것은 시인이기 전에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인생의 진리이기도 하다. 먼저 말을 붙이고 손을 건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고 한다. 신 작가는 작품 속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먼저 사랑을 주려는 생각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누군가를 먼저 사랑해주는 것이 정말 귀하고 소중한 마음이거든요. 단순히 현상을 보지 않고 본질을 꿰뚫고 가는, 그런 마음만 있어도 인생의 힘든 것들이 꽤 괜찮아져요.”
작가는 이것이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세상의 많은 좋은 시에는 그런 고민들이 담겨 있고, 그런 고민들이 자연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고 저마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가 생기는 일이라는 말이다.
신현림 시인 추천 책, 책, 책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민음사
1982년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리얼리티와 토착 신화의 상상력을 결합한 <백년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마르케스의 작품. 90세에 이른 작가가 90세 노인의 14세 소녀에 대한 사랑을 그려 화제가 된 소설로, 대가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를 감상할 수 있다.
<네루다 시선> 파블로 네루다|지식을만드는지식
파블로 네루다의 방대한 시 세계를 대표하는 65편의 시를 엄선해 엮은 책이다. 1971년 칠레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시인이자 혁명가로 기록을 남겼다. 이 작품집은 전문가의 자세하고도 친절한 해석과 주석으로 네루다와 네루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표도로 도스토옙스키|민음사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3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그가 평생 고민한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에 대한 모든 문학적인 고민이 녹아 있다. 철학, 심리학, 종교를 아우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임언영|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