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네덜란드의 철학자이다. 오늘날 그는 대단한 철학자로 칭송받지만, 살아생전에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그는 시골집 다락방에 피신해 일생을 숨어 살다시피 했다. 또한 광학렌즈를 깎는 고된 일을 하며 생계를 근근이 유지했다.
스피노자의 집안은 본래 포르투갈에서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 대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종교적 갈등이 심각했던 때였다. 스피노자가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는 30년에 걸친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 전쟁 또한 종교적 갈등에서 시작됐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네덜란드에 개신교가 확산되자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개입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에 반발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스피노자가 17세때인 1648년 네덜란드는 전쟁에 승리해 스페인에서 독립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 사회의 주도적 계층이 바뀌었다. 네덜란드 사회를 주도했던 귀족층이 전쟁 과정에서 대부분 전사하고 시민계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시민계급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정치적·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유럽 각국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로크,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로 망명한 대표적인 인사였다. 로크는 5년, 데카르트는 무려 20년간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스피노자의 집안은 대대로 유대교를 신봉했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적 박해가 심해지자, 스피노자의 아버지는 포르투갈을 떠나 네덜란드로 갔다. 유대교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종교적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대교의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고자 했다.
어느 날 유대교회의 장로들이 스피노자를 불렀다. 그들은 “자네는 친구들에게 신은 신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나?”라고 물었다. 교회 입장에서는 심각한 얘기였다. 신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은 신이 영원하지도 불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스피노자에게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버리면 장학금 지급 등 각종 혜택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피노자가 교회에서 촉망받는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교회 장로들은 그가 유대교 신앙의 빛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피노자 역시 장로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교회 교리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신은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며 자신이 가진 의문을 토로했던 것이다. 장로들의 질문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적 파문을 당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장로들의 제안을 거부했던 것 같다. 그가 파문을 당한 것은 25세 때였다.
장로들이 스피노자를 파문하며 내린 판결의 내용은 가혹했다. “스피노자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에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한마디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교회 판결은 스피노자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저주의 판결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적 형벌이 가해졌다. “누구나 입으로 스피노자와 말을 주고받지 말라. 글로써 그와 의사를 주고받지도 말라. 아무도 그를 돌보지 말라. 아무도 그와 한 지붕 밑에서 살지 말라. 아무도 그의 옆 2m 근처에 접근하지 말라. 아무도 그가 구술했거나 직접 쓴 문서를 읽지 말라.”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스피노자와 함께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판결에 따라 형제도 친구도 스피노자 곁을 떠나갔다. 그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 열혈 청년 교인이 스피노자를 습격했다.
스피노자는 두려웠다. 주변 사람들과 단절되었고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다. 그는 암스테르담 인근 시골 마을의 외딴집 다락방으로 피신했다. 이 후 스피노자는 그 집주인 부부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스피노자는 고독했고 어두운 밤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운을 행운으로 전환시켰다. 장로들의 지독한 저주가 있었음에도 스피노자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지워지기는커녕 밝은 빛처럼 빛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괴로워하며 지내는 것이 헛된 일임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행복을 찾는 일임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명예와 부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것들을 얻기 위해 달리다 실패하면 오히려 더욱 심한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스피노자는 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인 철학은 실패에 따른 고통이 생길 염려가 없다. 실패가 없기 때문에 즐거움만을 가져다줄 것이다.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철학을 하라.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는 ‘행복’이다. 그가 교회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한 이유 또한 행복 때문이었다. 교회의 교리는 현실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초월적 신은 심판자이다. 인간이 선행을 하는 이유는 신의 심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신은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회의 교리는 올바르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신이 행복의 원천이 되려면 현실 세계 안에 존재해야 한다고 여겼다. ‘신은 신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 단초였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신은 곧 자연’이라고 했다. 이 말은 신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길가에 피어난 풀 한 포기에도 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 속에서 행복의 원천인 신을 발견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획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에 신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차등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은 누구나 차등 없이 삶을 누리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삶을 유린하는 행위는 행복을 빼앗는 해악적 행위이다. 지위가 높거나 권력을 가진 자, 그리고 경제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갑질’이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다. ‘갑질’은 직접적인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지위를 남용하는 것 또한 갑질이라 할 것이다.
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