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2009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적으로 경제정책 패러다임 전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 신자유주의의 불가피성을 언급했던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과학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실패했음을 강하게 공언하고 나섰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원적 불안정성과 그것의 소멸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이 시대의 역사특수성을 다시금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노동의 재급진화(Re-radicalization)나 일터 민주화(Democratization at Work)를 향한 새로운 노력이 시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처방도 내놓았다.
학자들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던 주요 국제기구들 역시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른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곳이 OECD이며, 심지어 IMF조차 그러한 흐름에 동조했다. 오늘날 탈규제가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외치는 집단은 더 이상 쉽게 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포용적 성장, 혹은 임금주도성장 등의 이론을 실제로 국가정책으로 구현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나선 대표적인 정부가 있다. 바로 한국의 문재인정부다. 한국은 많은 나라가 신자유주의를 버리던 때에도 여전히 수년간 그러한 기조를 지속해간 나라다. 결국 타락한 정치권력이 촛불의 철퇴를 맞고 몰락한 이후, 불평등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인지하고 그것과 맞서겠다는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IMF조차 신자유주의 불평등 경계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정책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으로 정부의 개혁정책 이외에 사회적 대화를 택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여러 선진국은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해 심화된 노동시장의 이중화(Dualization)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전개하면서도 사회적 대화가 그 방법론으로 적합할 주장에는 인색하다. 유럽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조가 힘이 빠진 상황에서 내부자들(Insiders), 즉 핵심 조직층의 이해를 약화시키며 외부자들(Outsiders) 즉, 미조직 주변부 노동자들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식의 교환을 도모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역할은 정부주도로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회적 대화의 종주국인 유럽 국가들이 사회적 대화로 선뜻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포용적 성장과 함께 사회적 대화의 방법론을 내세우고 나선 건 주목할 일이다. 알다시피 한국은 사회적 대화를 하기 위한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나라다. 지난 1990년대부터의 시도들이 그다지 괄목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그 어려움을 증명한다. 정부의 필요에 따라 노사를 동원하는 정도로 사회적 대화를 활용하려 했을 뿐이고, 그나마 민주노총은 근 20년간 이 틀 자체를 거부해왔다.
그러던 것이 촛불혁명과 문재인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변화되어갔다. 2017년 말, 민주노총 선거에서 4명의 후보 가운데 3명이 사회적 대화를 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다. 취약 노동자들의 이해 대변을 위해 한국노총은 노조 이외에 노동회의소 같은 기구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여러 층위에서 조직노동은 명시적으로 양보까지는 아니지만 하후상박 교섭을 추구하거나 다양한 형태의 연대기금을 마련해 노동 불평등 해소를 향해 움직여갔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2018년 1월부터 11월까지 존속한 노사정대표자회의이고, 그것을 산파로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현재의 중앙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이다. 경사노위는 현재 5~6가지의 의제별 위원회와 2개의 업종별 위원회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합의적 전환(Consensual Transformation)을 향한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조만간 계층별 위원회가 만들어져 저대변 취약층을 위한 의제 개발과 이해 대변을 향한 획기적인 시도도 도모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대화는 포용적 성장–노동 존중과 함께 세 꼭짓점
그러나 경사노위를 통한 사회적 대화는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국가주도의 경제 운영이 뿌리 깊은 나라에서 노사로 하여금 합의를 해보라고 요청한들, 어찌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책임하에 해법을 찾아내며 타협을 해내는 성숙한 파트너로 탈바꿈할 수 있으랴.
게다가 이제는 새로운 구조하에서 단지 노사 정상단체들(Peak Associations)이 합의한다고 전부가 아니게 되었다. 계층 대표들까지 설득되는 합의여야 경사노위에서 의결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사회적 대화의 저변이 넓어진 만큼 총체적 합의를 향한 노력은 더 ‘두텁게’ 또 ‘농도 짙게’ 전개될 것을 요구받는다. 경사노위 스스로 자신을 ‘합의기구’가 아니라 ‘협의기구’라고 정체성을 부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포용적 성장과 노동존중사회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대화는 문재인정부가 추구하는 노동정책이 형성하는 삼각형의 세 꼭짓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전제 조건이 되며 서로 맞물려 있다. 셋 중에 하나라도 포기할 경우 나머지도 무너질 수 있다.
지금 포용적 성장의 지속적인 실현 기반 마련, 취약층의 이해 대변을 적극적으로 연계 짓는 시대적 필요에의 부응이라고 하는 방법론과 사명을 온전히 구현시키기 전에 사회적 대화가 잠시 위기에 빠졌다. 사회적 대화의 위기는 문재인정부 정체성의 위기이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모두 살리는 쪽으로 새롭게 심기일전해야 한다.
사회적 대화는 길게 봐야 한다. 당장의 현안도 다루어야 하지만 그 결과를 합의로 만들어내기 위해선 반드시 농도 짙은 과정이 동반돼야 한다. 대화기구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조율과 협력이 필요하다. 참여자들과 관계자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신뢰하는 관행을 뿌리내리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세계는 지금 불평등을 극복하는 진지한 정책적 노력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가능함을 보여주는 새 역사를 한국이 써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후진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진국에서 사회적 대화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을 날이 오길 바란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_노동사회학자이며 현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독일 쾰른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쾰른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베를린 자유대학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한국의 사회적 대화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작업에 힘을 보탰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