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들머리에서부터 평화의 바람이 분다. 남북 정상이 서로 훈풍을 주고받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월 1일 조선중앙TV를 통해 내보낸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 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남북 정상이 2018년 9월 19일 합의한 평양공동선언에는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기로 되어 있는데, 한발 더 다가선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바로 다음 날 화답했다. 2일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린 기업인들과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새해에는 평화의 흐름이 되돌릴 수 없는 큰 물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한반도에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면 평화가 번영을 이끄는 한반도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실현하고, 북방으로 러시아, 유럽까지 철도를 연결하고, 남방으로 아세안, 인도와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평화가 우리 경제에 큰 힘이 되는 시대를 반드시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2018년 남북이 선택한 길은 전쟁 위험의 해소다. 남북의 소통과 협력만이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유일한 수단임을 확인했다. 독일 통일의 전도사였던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1981년 한 연설에서 평화의 가치에 대해 “평화가 전부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으면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접촉을 통한 변화’와 ‘큰 평화를 향한 작은 걸음’을 강조한 바 있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장벽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 대립과 냉전의 강은 건넜다. 이제는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작은 발걸음을 더 많이, 더 넒게 모아볼 때다.
“여기는 대한민국 부산입니다 평양~중국~러시아~유럽행 열차 출발합니다”
▶강원도 동해선 강릉역을 향하는 열차 | 한겨레
속도 내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
새해 정부 각 부처의 업무보고에서 가장 자주 강조되는 단어는 ‘체감’이다. 국민이 직접 누리거나 느낄 수 있는 구체적 변화가 올 한 해에는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국민이 체감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진전이 있어야 한다. 2018년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향한 담대한 여정의 한 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국민들이 열어놓은 평화의 길을 아주 벅찬 마음으로 걸었다”며 이제부터 “평화가 국민 한 분 한 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 삶에 도움이 되는 남북관계 진전은 교류와 협력이다.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활발해지면 평화의 혜택을 국민이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남북의 철도·도로 연결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철도와 도로 같은 교통 인프라의 구축이야말로 전형적인 생활형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이다. 또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를 위해 문재인 정부가 채택한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의 핵심 사업이기도 하다. 신경제지도 구상의 두 축인 환동해 경제벨트와 환황해 경제벨트를 형성하려면 한반도의 위아래를 연결하는 통합 교통체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엔 대북제재 대상 예외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유엔(UN)과 미국의 대북제재 국면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뒤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경제협력 분야 후속조처’로 당국 간 고위급 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철도·도로·산림 분야 협력을 위한 실무 분과회담의 구성과 일정에 합의했다. 이후 분과회담에선 우선적으로 연결할 철도와 도로 노선을 선택했고, 철도 노선의 북측 구간 현대화를 위한 현지 조사도 진행했다. 경의선은 문산~개성~신의주, 동해선은 제진~금강산~두만강까지를 시설 개선 대상 구간으로 설정한 남북 공동연구조사단은 선로 보수, 주요 역사 주변 공사, 신호 및 통신체계 통합 방안 등을 활발히 논의하고 있다.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합의한 대로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도 해를 넘기지 않았다. 2018년 12월 26일 북측 개성 판문점역에서 열린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은 유엔 대북제재 대상의 예외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17년 9월부터 발동된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안 2375호에 따르면, 비상업적이고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공공사업은 제재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얻으면 예외가 될 수 있다. 대북제재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가운데서도 남북경협의 불씨를 살리는 여지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남북경협의 상징적인 첫발은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착공식 기념사에서 “철도, 도로의 연결을 통한 남북 간 교류와 왕래는 한반도 평화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줄 것이며, 적대와 대립에 쓰였던 수많은 비용과 노력은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쓰일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평화롭고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장관은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단순한 물리적 결합 이상의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물리적으로만 보면 철도·도로 연결은 재화와 서비스, 생산요소, 그리고 사람의 이동을 촉진해 지역 발전과 경제성장을 가져온다. 남과 북의 끊어진 혈맥이 이어지면 남북한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한반도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할 수 있는 파급 영향이다. 또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문화적 이질감 해소, 경제적 격차와 완화 등 무형적인 기대 효과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철도·도로 연결은 미래 통일의 기반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2018년 12월 26일 오전 개성 판문역에서 진행된 ‘동·서해선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서 남북 관계자들이 궤도 체결식을 하고 있다. | 한겨레
남북 도로망 구축사업도 활발
북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의 진전에 따라 대북제재가 완화되기만 하면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은 곧바로 탄력이 붙을 수 있다. 특히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길은 쉽게 열린다. 길이 518.5㎞의 경의선은 원래 1906년 4월에 개통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단절됐다. 그러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복원 사업에 합의했으며, 2003년 6월 남북 공동으로 군사분계선에서 궤도 연결식을 열었고, 2007년 5월 열차 시험운행에 이어 2007년 12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도라산~판문 구간을 오가는 정기 화물열차도 운행했다.
그러나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그해 12월부터 운행을 중단했다. 다시 개통하는 데 물리적 어려움은 없다. 10여 년 동안 방치된 선로를 점검하고 보수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부산에서 출발해 북한의 동해 연안지역을 관통한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닿도록 그려진 동해선도 남북 간 궤도 연결 공사를 이미 끝냈다. 역시 6·15 선언을 계기로 강원도 제진에서 북한 감호를 연결하는 구간에 철로가 만들어져 2007년 5월 몇 차례 시범운행까지 했다. 다만 동해선 남쪽의 강릉~제진 104.6㎞ 구간은 선로가 아예 없는 상태이다. 유엔 대북제재와 상관없는 구간인 만큼 우리 정부가 선로 구축사업에 속도를 내면 된다. 해당 구간에 대해선 국토교통부가 이미 3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2016~2025년)에 포함시켰다.
남북 도로망 구축사업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남북은 도로 현대화 사업의 1차 대상을 서쪽은 개성~평양(171㎞), 동쪽은 고성~원산(107㎞) 구간으로 합의했다. 남북이 왕복 4차로 수준의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만들면 부산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가 뚫린다. 2015년부터 건설이 추진되다 잠정 중단된 개성~문산 고속도로와 2020년 완공 예정인 수원~문산 고속도로를 경부고속도로와 연결하면 된다.
고성~원산 구간의 현대화는 북한이 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목적으로 1989년에 건설한 관광도로를 개보수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이 끝나면 고성~원산 구간은 동해안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7번 국도, 2023년까지 마무리될 예정인 동해고속도로와 자연스럽게 이어질 전망이다.
35개국 55개 노선 아시안 하이웨이 뚫려
남북 도로 연결은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UN ESCAP)가 개념화한 ‘아시안 하이웨이(AH)’의 구축에도 기여한다. 아시안 하이웨이는 아시아·유럽 지역 35개국 도로를 55개 노선으로 나눠 국제 간선도로망을 구축한다는 다국적 구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6년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아시안 하이웨이 1번(AH1), 7번 국도와 동해고속도로가 6번(AH6)으로 각각 지정되어 있으나 북쪽이 막혀 이름값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젠 막힌 길이 뚫려야 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은 대북제재 문제가 해소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북한 구간의 신설이나 개보수, 현대화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북 당국은 중장기 과제와 목표를 염두에 두고 단계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반도 종단철도(TKR)의 중심축이 될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만 해도 종착지는 한반도를 넘어 유럽·아시아 대륙을 지향한다. 경의선은 신의주를 통해 중국~몽골~중앙아시아~유럽까지 이어지는 중국 횡단철도(TCR)와 만주 횡단철도(TMR)에 연결하고, 동해선은 나진~하산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잇는다는 게 목표이다.
이를 위해 우리 정부는 지난해 6월 북한의 찬성을 얻어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중국과 러시아 등 28개국 대표가 정회원으로 참여하는 이 기구는 철도 운영을 위한 국제협의체로, 총연장 28만㎞에 이르는 유라시아 철도노선의 운영 방안을 결정한다. OSJD 가입에 따라 우리나라는 유라시아 대륙철도 건설 및 운용에 따른 수익 배분, 선로 배분, 여객과 화물 운송에 대한 감독·통제 등의 기준과 절차를 마련하는 과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남북 철도 연결사업에는 중국, 러시아, 몽골 등 주변국과 국제기구의 관심도 높다. 중국의 동북3성(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개발계획, 러시아가 추진 중인 나진-하산 프로젝트, 유엔개발계획(UNDP)의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등이 모두 한반도와의 물류·교통망 연결에 관련된 프로젝트이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는 동북아 프로젝트를 핵심적인 국가 발전전략의 하나로 내세운 듯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두 차례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신의주~개성 간 철도·도로 개보수를 제안하며, 동북아 물류 인프라 투자는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구축)’ 사업의 연장선임을 강조한 바 있다.
▶남북 철도 공동조사가 시작된 2018년 11월 30일 남측 기관차 1량과 열차 6량이 남측 조사단 28명을 태우고 서울역을 출발해 군사분계선을 통과. 북측 판문역에서 북측 기관차에 인계되고 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박순자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이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한겨레
동북아시아 관문 상상을 현실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정상회담에서 “남과 북, 러시아의 3각 협력사업을 위한 공동연구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철도·전력·가스 분야의 유관 당국 및 기관을 통해 협력한다”는 내용을 공동성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남북 철도와 유라시아 철도의 연계사업에 대한 주변국 참여 의지가 높다는 것은 파급 효과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우리 국민에게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남과 북의 시간대가 12번이나 바뀌는 거리를 육로로 오갈 수 있고, 경의선과 중국 횡단철도의 고속철도화 사업까지 마무리된 다음에는 동북아 1일 생활권이 서울에서 중국 베이징까지 확장된다. 화물 운송의 시간 단축과 비용 절감으로 기업들의 수출입 여건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분단 이후 대한민국은 섬나라 아닌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환경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3면은 바다이고, 또 다른 한 면은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군사적 대치로 얼룩진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 장벽이 허물어진다는 전제로 꿈 같은 상상을 해왔다.
한반도를 세로로 관통하는 철도와 도로가 뚫려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고, 한국은 유럽·아시아 대륙을 향하는 동북아시아의 관문으로 탈바꿈하는 꿈이다. 상상 속의 꿈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에 담겨 있었다. 그 구상에 대한 실행 계획을 착착 마련해 이행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다. 꿈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박순빈 기자
▶2007년 5월 17일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 열차가 도라산역을 통과해 통문을 지나자 남측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한반도기를 흔들고 있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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