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 아마도 한반도 비핵화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세계사적인 대전환, 업적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 23일(현지 시간)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열린 한미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가시권으로 들어온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기대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올해 2월 말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답보 상태를 보이던 북미 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북미 실무회담은 이르면 9월 말 또는 10월 초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미 군사연습 등을 문제 삼으며 미국과 비핵화 실무협상 재개를 미뤄온 북한이 최근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북한 대미 라인의 핵심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9월 9일 발표한 담화에서 “우리는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 측과 마주 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곧 북미 실무협상 재개될 듯… 연내 정상회담 가능성도
북한의 실무협상 제안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슈퍼 매파’로 꼽히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질한 것도 북미 협상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볼턴 보좌관은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대북 강경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북한은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에서 체제 안전 보장 문제와 제재 해제가 논의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한 외무성 미국 담당 국장은 9월 16일 발표한 담화에서 “우리의 제도 안전을 불안하게 하고 발전을 방해하는 위협과 장애물들이 깨끗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제거될 때에라야 비핵화 논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외무성 국장이 언급한 ‘제도 안전’은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체제 보장 조치를, ‘발전을 방해하는 위협’은 제재를 의미한다.
미국 국무부는 같은 날 북한이 체제 안전 보장 문제와 제재 해제가 논의돼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데 대해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관련 논의를 할 준비가 돼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미 정상도 9월 23일 회담에서 북한과 70년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싱가포르(1차 북미정상회담) 합의’ 정신을 유지하고 북한을 상대로 무력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재확인했다. 이는 체제 안전을 보장한다는 메시지를 발신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조기에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조만간 재개될 북미 실무협상이 잘 풀리면 연내 3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가정보원은 9월 24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2∼3주 안에 북미 실무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이 크고, 실무협상에서 합의가 도출되면 연내에도 3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여야 의원들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세계사적인 대전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3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려면 북미 양측이 실무협상을 통해 그동안 북미 대화의 진전을 가로막은 최대 걸림돌인 비핵화 방법론을 둘러싼 이견을 해소해야 한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당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쇄와 북한 민생경제에 영향을 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의 해제를 제안했지만, 미국은 영변 이외 북한 핵시설 관련 정보를 제시하면서 영변 핵시설 폐쇄만으로는 핵심 대북제재를 해제할 수 없다고 맞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포괄적 합의–단계적 이행’ vs ‘단계적 합의–단계적 이행’
북한은 단계적 비핵화를 원했지만,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대북제재의 전면 해제를 향한 ‘빅딜’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됐다. 비핵화 방법론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볼턴이 주장한 리비아 모델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언급한 것은 주목된다. 리비아 모델은 ‘선(先)핵폐기, 후(後)보상’ 방식인데 핵폐기 이후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강하게 배척하는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 18일 “볼턴이 리비아 모델을 언급하면서 상황을 매우 심하게 지연시켰다”며 “그가 과거에 얼마나 서툴게 일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새로운 방법이 매우 좋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명길 북미 실무협상 수석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새로운 방법과 관련해 “조미(북미) 쌍방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으며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단계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취지가 아닌가 싶다”며 단계적 접근을 거듭 주장했다.
미국이 북미 실무협상에서 북한이 제시하는 단계적 접근에 호응할지는 불투명하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비핵화 과정을 ‘동결, 감축, 폐기’ 3단계로 크게 구분하고 단계별 비핵화 조치에 따른 미국의 상응 조치를 요구하는 이른바 ‘살라미 전술’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미국 조야에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 없이는 북한이 원하는 제재 완화 등을 선물해서는 안 된다는 기류가 강하다.
물론 미국도 북한 비핵화가 일순간에 이뤄지기 힘들다는 점은 알고 있다. 이미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과거의 핵(보유 핵무기), 현재의 핵(보유 핵물질), 미래의 핵(핵물질 생산시설)을 모두 검증 절차를 통해 완전히 폐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미국의 입장은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포괄적 합의-단계적 이행’이었다. ‘단계적 합의-단계적 이행’을 원하는 북한과는 비핵화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
현재로선 비핵화 방법론에 대한 북미의 견해차가 좁혀졌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북미가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으면 비핵화의 범위와 방법, 상응 조치 등을 놓고 팽팽한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9월 20일 한 학술회의 기조연설에서 북미 협상에 대해 “비관론이 90%인 데 반해 낙관론은 10%, 그중에서도 협상이 될 거라 보는 분은 1∼2%에 그친다. 저는 그런 열린 낙관론자에 속한다”면서 “북미 협상은 결국 지도자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 분야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대선 전까지는 북한 핵문제에서 분명한 성과를 내야 하고, 제재로 어려움을 겪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마냥 시간을 끌 수는 없기 때문에 북미 정상 모두 타결을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인 셈이다.
김호준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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