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정문에서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작은 주택가 골목에 신촌의 유일한 공연 예술 소극장인 신촌극장이 있다. 지난 6월 3일 개관한 이곳은 연세대 사회과학부 연극 동아리 ‘토굴’ 출신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공간이다.
자동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 신촌극장은 일명 ‘신촌 먹자골목’의 한쪽 끝에 남은 몇 되지 않은 주택가의 옥탑에 위치해 있다. 작은 간판이 하나 걸려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아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주택으로 보인다. 과거 크고 작은 극장들이 사라져 ‘신촌 유일의 공연 예술 소극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지만 공연장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불친절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4층짜리 건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옥탑방의 문을 스르륵 열면 신촌극장의 공연장이 나온다. 공연장이라고 하지만 무대도 없고 객석도 없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관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는 공연의 성격에 맞게 유동적으로 놓여진다.
“신촌이 정말 많이 달라졌는데, 이 골목만 희한하게 재개발이 되지 않고 예전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상업성이 없는 과거 신촌의 향수를 느끼기에는 그만인 공간입니다. 찾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고 간판을 만들어달라는 분들도 있는데, 이게 신촌극장과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곳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전진모 대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현직 연극 연출가이기도 한 그는 뜻이 맞는 동기들과 함께 신촌극장을 만든 장본인이다.
▶ 1,2 신촌극장에서는 연극, 퍼포먼스, 전시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은 공연과 관객과 소통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열리고 있다. ⓒ신촌극장
연극 동아리 멤버들의 술자리 의기투합이 시초
시작은 술자리였다. 장소는 연세대 연극 동아리 ‘토굴’ 멤버이자 신촌극장의 공동 대표인 원부연 씨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술집. 자연스럽게 동아리 멤버들의 사랑방이 됐고, 다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이 모아졌다.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같은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일이 추진됐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서 4000만 원을 받아 설립했어요. 액수가 너무 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목표 달성을 했어요. 동아리 선배들, 대학 동문들, 친구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후원을 해주신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전 대표는 공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은 사라진 공간들, 헌책방이나 공연장 등을 그리워하는 지역 사람들의 향수도 자극했다. 많은 사람의 꿈을 모아서 만든 만큼 책임감도 무겁다고 한다.
현재 이곳의 운영자는 4명이고, 00학번인 전 대표와 02학번인 원부연 씨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연극연출가와 술집 대표 이외에도 영화 제작자, 스타트업 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몫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영역을 쌓은 사람들이 모여 인프라의 폭이 넓은 것이 신촌극장의 장점이기도 하다. 작은 공간이지만 연극뿐 아니라 퍼포먼스, 전시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은 공연과 관객과 소통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열릴 수 있는 기반도 이런 환경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 3 12월 19일부터 24일까지 전윤환 연출의 연극 ‘둘만의 사건’ 공연을 선보였다. ⓒC영상미디어
신촌극장의 공식 개관일은 6월 3일이지만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된 것은 9월부터다. 지금까지 7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최근에는 12월 19일부터 24일까지 전윤환 연출의 연극 ‘둘만의 사건’ 공연이 열렸다.
“작품의 원칙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이 공간에 맞춰 생산한 새로운 이야기를 담으려고 합니다. 내년 2월까지 연극과 배우 퍼포먼스가 있을 예정이에요. 구체적으로 라인업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낭독 공연 등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 대표는 처음 극장을 오픈하면서 극장이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만남’과 ‘경험’이라는 키워드를 얻게 됐다. 본인이 연극을 하는 사람이고 연극 동아리 멤버들에게서 시작된 프로젝트지만 장르적인 구분보다는 관객이 모여서 같이 만날 수 있는 장을 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본인의 작품도 올릴 예정이다.
“처음에는 제가 연출하지 않는 게 목표였어요. 내가 대표로 있는 공간에서 내 작업을 하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같아서요. 이 공간의 취지가 다양한 작가들과 만나기 위한 것이니, 일단 그 의도에 맞출 생각입니다. 내년쯤에는 하나 하고 싶어요.”
▶ 1 윤자영 작가의 퍼포먼스 공연 ‘Lover’s Leap‘ 중 한 장면 ⓒ신촌극장
▶ 2 4층짜리 주택 건물 옥탑에 위치 한 검은 공간이 신촌극장이다. ⓒC영상미디어 3 초록색 대문 옆에는 극장 에티켓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C영상미디어
▶ 4 장현준 작가의 ‘시간 - 몸 - 극장- 그릇-’ 퍼포먼스 공연 리허설 중 옥상훈 작가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신촌극장 5 신촌극장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 관객석 의자에 하나씩 붙여놓았다. ⓒ신촌극장
극장+살롱, 아티스트+관객의 소통 공간 만들고파
신촌극장에는 40개의 의자가 있다. 공연이 열리면 보통 20~25개의 의자를 꺼내놓는다. 20평이 채 되지 않는 공연장은 별도의 무대가 없다. 관객과 예술가의 경계도 없다.
“처음 이곳을 만들 때 모토가 ‘극장+살롱’이었어요. 살롱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잖아요. 공간을 재미있어 하는 작가들, 이런 조촐한 공간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와주는 관객들, 이들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고민했고, 실제로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작가와 관객들의 관계가 형성돼가는 걸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고 감사합니다.”
전 대표는 신촌극장을 운영하는 요즘이 즐겁다. 연극 연출을 하다 보면 다른 공연을 보는 게 쉽지 않고, 보더라도 같은 연극만 보게 되는데 지금은 친분의 접점이 없었던 안무가, 퍼포먼스 작가, 시각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접하면서 친분이 생겼다. 그들이 극장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또 다른 영감을 얻기도 한다.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전 대표는 직업으로 연극을 선택할 계획이 없었다. 우연히 가입한 동아리였고, 일단 동아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연기를 하게 됐고, 공연 팀에 끼게 됐고, 연출도 해보니까 재미있어서 이것저것 시도를 했다.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하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게 됐다.
“연극을 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넌 그래도 하고 싶은 일 해서 좋겠다’고 말해요. 전 그 말이 싫어요. 선택을 안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물론 떠밀려서 정말 원하는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기도 하겠지만, 결국엔 저마다 선택한 삶을 사는 거예요.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을 붙이려면 왠지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고, 돈과는 무관해야 할 것 같은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본인이 재미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돌이켜보면 결국 자신이 재미있고 즐겁게 살기 위해 선택한 것들의 집합이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버틸까가 아니라, 어떻게 더 즐거울까를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으니, 그저 그 기준에 맞춰 어떻게 더 즐거울 수 있을지를 생각했던 것이 연극과 문화예술을 해올 수 있었던 힘이었다고 한다.
전 대표는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답을 일찍 내리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선택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인 것 같다고 조언했다. 즐거운 일을 찾는 삶. 그것은 전 대표의 인생 모토이자 신촌극장의 모토이기도 하다.
“지금 목표라면 이곳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싶어요. 상황은 언제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만큼 언젠가는 극장의 존재가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게 신촌극장의 존재 가치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길고 강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추세가 하나씩 더해지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작은 공간을 방문하고 문화예술을 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더라도, 이것이 씨앗이 되어 5년 후, 10년 후 누군가에게 또 다른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임언영│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