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를 인정하는 이유, 길을 만들어가기 때문 아닐까? 세계 최초로 휴대용 수력발전기를 만들어 보급하는 박혜린 이노마드 대표 역시 수력 에너지의 한 갈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가치를 인정받으며 수력발전기의 가능성을 보여준 ‘우노’로 승부수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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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 전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미국의 대표적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킥스타터’에서 들어온 선주문이 1500대, 모금액은 1억 8000만 원을 기록했다. 2016년 8월 펀딩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1년간 제품에 몰두해 이노마드의 ‘우노’가 10월 출시됐다. 연말까지 주문받은 추가 물량이 3000대로 올해 매출액 10억 원 달성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돌풍의 주인공 ‘우노’는 휴대용 수력발전기다. 유속의 힘으로 2~7W(와트)의 전력을 만든다. 전력은 배터리에 저장돼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등 휴대용 기기를 충전할 수 있다. 밤에는 랜턴으로 활용할 수 있고 비상시 SOS 신호를 보내는 데도 이용된다. 물병 크기에 무게는 620g, 휴대성까지 갖췄다. 지금까지 이런 제품이 없었냐고 반문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구조지만 수력으로 시판된 제품으로는 우노가 처음이다.
우노의 주요 시장은 미국이다. 박혜린 대표는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공략했다. 미국, 유럽 등에 장기간 야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미국에서 카누·카약을 즐기는 수는 1000만 명에 이른다. 물에 대한 접근성이 전제돼야 하는 수력발전기답게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에 집중한 것이다. 물 위를 달리는 카누에 우노를 매달아놓으면 유속에 의해 터빈이 돈다. 놀다 보면 전력이 생기는 셈이다.
우노가 탄생하게 된 계기를 묻자 박혜린 대표는 대학생 때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떠올렸다. 몇 달에 걸쳐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발걸음은 인도 남부 산악 지역에 도착했다. 이때 홀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사는 가정에 머물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양초를 켜놓고 밥을 먹을 만큼 문명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모자는 디지털카메라에 관심을 보였다. 박 대표는 이들에게 디지털카메라를 선물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들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격이었다.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박 대표는 에너지와 전력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전력 인프라에서 소외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구나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전력을 생산하자’ 박 대표가 재생에너지에 주목한 이유다. 회사 이름 역시 이노마드(enomad), 에너지(energy)와 유목민(nomad)의 합성어로 지었다.
주요 시장은 레포츠·캠핑족, CNN도 보도
막상 회사를 설립하고 수력발전 제품을 계획했지만 막막했다. 제품은 어떤 크기로 얼마만큼의 전력을 생산해야 하는지, 사용할 사람은 있을지 걱정됐다. 박 대표는 도심 청계천에서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8개월간 서울시청을 드나들며 관계자들을 설득한 끝에 허가를 받았다. 2014년 8월 드디어 첫발을 내딛었다. ‘청계천 스마트 충전소 프로젝트’였다. 석 달 동안 시민들은 청계천에서 수력발전기가 만드는 전력에 감탄했다. 활용성에 대한 아이디어도 함께 제시해줬다.
▶ 1 이노마드의 ‘우노’는 유속의 힘에 의해 터빈이 돌아가고 전력을 생산한다.
2 유속에 따라 생산된 2~7W의 전력은 배터리에 저장돼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다.
3 밤에는 랜턴으로도 사용 가능하다.ⓒ이노마드
수력발전 제품은 국내외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던 중 CNN의 보도가 나가고 미국에서 뜻밖에 제안이 왔다. 미국의 캠핑, 야외스포츠 시장이 큰데 진출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즉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동차를 빌려 미국을 횡단하며 60여 곳의 캠핑장을 찾았다. 미국은 일주일에서 한 달씩 장기간 캠핑, 수상 레저 등을 즐기는 문화가 일상화돼 있었다. 그들은 야외에서 휴대하기 편리한 크기, 다루기 쉬운 구성 등을 선호했다. 이미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나 바이오매스 충전기 등이 있었지만 소비자를 만족시킬 만한 제품이 없다고 판단했다. 박 대표는 연구와 조사를 거듭하며 배터리 용량, 무게, 디자인 등을 발전시켜나갔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영된 시제품 ‘이스트림’이 ‘킥스타터’를 통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러자 곧 자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왜 하필 수력일까? 박 대표는 물의 밀도가 높다는 점을 강점으로 꼽았다. 같은 터빈으로 풍력보다 더 큰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태양광 에너지는 날씨, 계절에 영향을 받지만 물은 제한이 덜했다. 물론 물에 대한 접근성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박 대표는 “생각보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물이 없어 무용지물이라고 하는 것은 콘센트가 없어 무용지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그렇지 않아도 박 대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 “근처 콘센트에서 전기 얻는 게 더 쉽다”와 같은 말이었다. 그는 “제품을 만들며 기술 장벽에 가로막힌 게 아니라 사람들 마음의 벽에 막혔다”고 했다. 전기를 싸게 많이 공급하는 시대를 지나 필요한 때에 필요한 용량을 공급해주는 방식으로 구조가 전환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너지 선진국은 소형 분산형 전원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도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회가 확산되길 바란다고 했다.
박 대표의 접근 방식은 에너지와 생활의 밀접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후 변화, 지속 가능한 발전 등의 거대 담론은 당장의 나의 삶과 관련짓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에너지 경험과 접점을 늘려가며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청계천 프로젝트처럼 말이다. 미국 국립공원에서도 ‘우노’ 보급에 나선다. 오염원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철저히 반입 금지되는 미국 국립공원에서 ‘우노’가 얼마만큼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해볼 만하다.
판매 계약을 위해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박혜린 대표. 몇 달간의 일정을 마치고 잊지 않고 들를 곳이 있다. 인도다. 10년 전 누구나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그곳에 들러 우노를 선물할 것이다. 문명이 깃들지 않은 곳에서 깨끗한 에너지로 깜깜한 밤을 밝힐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