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9회째를 맞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시상식이 지난 11월 2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렸다. 소설가 조정래, 화가 김구림, 민화작가 송규태, 음악인 고 이상규가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한 가운데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예술 유공 공무원 등 총 35명의 수상자가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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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관문화훈장 수상 민화작가 송규태
“한국 민화 발전에 도움 되고 싶어요”
“영광스럽습니다. 개인적인 영광보다 문화예술계에서 민화가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민화학회 소속 회원이 800명인데 제가 그분들을 대표해서 상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민화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민화계의 대부로 불리는 송규태 작가는 1990년대 민화 배우기 열풍을 이끌며 제자 양성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민화전통문화재 제1호’라는 타이틀도 송 작가의 것이다.
우리나라에 민화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 무렵이다. 송규태 작가가 민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도 이때다. 그의 역사가 우리나라 민화의 역사다.
“처음에는 민화가 아닌 모사 작업을 했어요. 가난했던 시절, 작가의 문하생으로 보조그림을 그리거나 보수 작업을 돕다가 작업 영역이 넓어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정·복원하는 일을 하게 됐죠. 그때 많이 작업했던 그림이 민화였어요. 당시엔 민화라는 말보다 고화(古畵)라고 불렀죠.”
그의 작업은 금세 업계에 알려졌다. “미술에 관심이 많던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작업을 많이 했어요. 삼성이 운영하는 미술관에 국보급 그림이 많거든요. 그걸 수정·복원하기도 하고, 외국인들에게 선물용으로 모사 작업도 했어요.”
한번은 그의 모사 작품이 공항에서 검열에 걸려 유출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가 그린 작품이 그만큼 옛날의 색감을 잘 살렸다는 것을 보여준 해프닝이었다.
팔십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정정하다. 홍익대 평생교육원과 본인이 직접 설립한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파인민화연구소에서 문하생들에게 민화를 전수하고 있다. 아들 역시 그에게 민화를 전수받았다. 한국민화협회 소속이기도 한 그는 제자들과 함께 전시회를여는 등 민화를 활성화하는 데 열심이다.
“팔십을 훌쩍 넘기니 어디를 가나 건강하라는 덕담을 들어요. 나라에서 상을 받은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민화를 더욱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열정을 가지고요.”
그에게 민화를 배운 제자들은 저마다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고 수시로 전시회를 열며 우리나라의 민화 영역을 단단하게 만드는 중이다. 우리나라 민화계의 밀알이 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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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관문화훈장 수상 현대미술가 김구림
“한국 문화예술계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김구림 작가의 수상 소감이다. 한국 미술계에서 평생 이단아로 살아온 그다.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지만 그는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며 입체와 행위, 영화, 음악, 연극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파격적인 행보를 이끌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는 1960~1970년대.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던 당시,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했어요. 명동에서 시위 퍼포먼스를 하고, 광복절을 기념해 ‘기성 문화의 장례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거리를 활보했죠. 고리타분함의 상징이었던 서울대 문리대에서 콘돔으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어요. 공부 잘하는 인재들이 있는 곳에 침입해 명예를 실추했다고 학생들에게 끌려가 맞기도 했죠. 낯선 예술의 단면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미술뿐 아니라 연극, 패션,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지인들과 함께 ‘제4집단’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분야를 넘나들며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것은 요즘이야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장르의 구분을 넘어 실험적인 예술을 했고, 사회적인 발언을 하면서 젊은이들의 욕구를 대변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이름 앞에 일종의 낙인이 찍혀버렸다.
국가기관에 연행된 경험도 있다.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고 어두운 기억이다. 무죄로 풀려나긴 했지만 당시의 경험은 그를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이끌었다. 그의 전위적인 작품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많은 것이 부족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과 미국으로 활동지를 옮긴 적도 있다.
“한국에 들어오고 싶었지만 먹고살 길이 없었어요. 외국에서 살자니 그것도 환경이 여의치 않고. 힘들었죠.”
그러나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을 알아보는 시선이 있었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초청을 받은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 잭슨 폴락과 함께 전시를 열고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 유일한 한국 작가’가 됐다.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대지예술을 발표한 후에는 세계 3대 비엔날레로 불리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국의 예술가로서 많은 곡절이 있는 세월을 함께했지만, 그는 그만의 역사를 밟아왔다.
“많은 분들이 제 수상 소감을 보고 연락해서 기분을 물어봐요. 저는 그냥 담담해요. 나중에 시간이 더 흐르고 흐르면 새로운 안목으로 새롭게 미술사를 쓰게 될 것이라는 희망은 있어요.”
ⓒ박준
젊은 예술가상 수상 시인 박준
“시로 보편적인 감성을 교류할게요”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9만 5,000 부의 판매 기록을 남겼고, 최근 펴낸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역시 8만 부의 판매를 기록하며 명실공히 출판계의 스타로 발돋움한 박준 시인이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시인이 상을 받는 것이 퍽이나 쑥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제가 갖고 있는 촌스러운 생각이지만, 시인은 체제에 질문을 던져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나라에서 주는 상을 받는 게 쑥스럽기도 해요. 일부러 수상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생기고요. 그렇지만 상을 주신 분들께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상은 격려니까요. 문학을 두고 생각하면 그걸 만든 작가 또는 시인, 그리고 그걸 접하는 독자가 있잖아요. 독자를 둘러싸고 있는 문학계와 문화계가 있고요. 그리고 그보다 조금 먼 곳에서 상을 만들고 주는 정부나 기관이 있는 것인데, 제 작품이 거기까지 멀리 소문이 갔구나 생각도 했어요.”
그는 예전에 비해 사람들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문학이 차지하는 공간이 많이 좁아졌다고 한다.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 작가로서 선배들이 잘 구축한 터전을 우리 세대에서 문학이 축소되는 것을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고.
“제가 시인이라고 모든 사람이 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시가 있어야만 넘어갈 수 있는 시간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때를 위해서 늘 시가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사람이 시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고, 시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 가까이 머물러 있길 바랍니다.”
그는 상이라는 격려를 받은 데 대한 보답을 시를 통한 교감으로 나누고 싶다고 한다.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가치는 새로움이지만, 그는 새로움보다는 보편성을 택했다.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라는 대화를, 본인의 시를 통해서 독자들이 나누고 교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보편성에 있다는 시선이 많다.
그는 직장인이기도 하다. 출판사 편집인인 그는 야근도 하고, 주말 근무도 한다. 다음 작품 일정을 물으니 매일 시를 쓰는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하다고. 대신 그는 ‘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시인의 정체성이 대수로운 것은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기척에 예민한 상태인 것 같아요. 타인의 말이든 길가의 표지판이든, 예민하게 반응하고 질문하는 것이 시인의 감수성 아닐까요? 저는 그걸 지키려고 해요.”
박준은 스스로 ‘아름답고 싶은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가치가 있는데 현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성을 교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본인의 시로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는 젊은 예술가상 수상을 계기로 ‘시와 시인의 의미’를 한 번 더 짚어보게 됐다.
임언영|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