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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흐려지고 있다. 연애고 결혼이고 뒷전으로 밀려난 세상에서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인간을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적어졌다. 그럴 여유가 없다.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 차량 안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들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간적인 경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떤 이는 우스갯소리로 ‘가축 수송’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수송되는 와중에 다른 이들을 돌아보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닿거나 밟히지 않기만을 바라며 지긋지긋한 시간을 견딘다.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은 살아 숨 쉬는 인격체의 존엄함을 갖지 못한다. 그림자 같은 배경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실제로 ‘인간증발’ 사업이 유행이라고 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2017년에 다룬 ‘증발하는 사람들’이 최근 SNS에서 다시 화제다. 빚, 가정폭력, 실업 등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자살 대신 일종의 ‘야반도주’를 택하고, 이를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사업이 음지에서 성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발된 사람은 연고가 없는 모처에서 전혀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다. 언뜻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나 돌아갈래”의 욕망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하다. 인간이 수증기처럼 ‘뿅’ 하고 사라진 자리에는 남은 자들의 고통이 드리운다. 하루 평균 36명이 세상을 뒤로하는 한국과도 멀지 않은 얘기다.
그들이 증발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사람이 평생 쌓아온 관계와 추억과 가족, 연인까지 등지게 만든 계기는 뭘까. 누군가는 극단적 개인주의라고 불렀지만 다른 짐작도 든다. 오히려 주변인 앞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엉엉 울며 고백할 수 없어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 용기가 없어서 차라리 사라지기를 택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특정 직업이나 역할로만 기능하고, 껍데기를 벗어버린 ‘나’로 존재할 수 없는 시대가 그들이 인생 전체를 저버리고 떠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내 손을 잡아줄 단 한 사람만 있었다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어느 고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들은 주변 사람 전체를 버린 게 아니라, 단 한 사람 앞에서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거다. 마지막으로 붙잡을 한 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했다. 섬에 가려면 조각배라도 띄워야 한다. 헤엄이라도 쳐야 한다. 첨벙 뛰어들지 않으면 소통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린다. 무엇보다 섬으로 가는 여정은 사람을 만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하룻밤 새 증발해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다시 인간의 손을 잡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개부터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데서 시작할 일이다. 증발하지 않으려면, 다시 누군가를 잃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오지현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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