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그녀의 한마디는 모든 사랑 이야기와 유쾌한 에피소드를 신기루로 만들었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 이야기다. 마술처럼 하룻밤 사이에 노인이 된 25세 여성의 판타지는 치매 환자의 시각에서 본 환상이었던 것! 중반 이후 드라마는 치매 환자가 왜곡했던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구성의 반전은 치매라는 병증이 현실에 던져줄 충격과 파국의 공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물론 실제 환자와 그 가족이 겪을 일상의 반전에 비하면 미화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실제 환자와 가족들에게 치매 이후 일상은 일종의 ‘호러물’처럼 잔인하게 펼쳐진다.
지인 모임에서도 드라마는 화제가 되었다.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있는 두 분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뇌 손상 부위에 따라 치매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주변인에게 물리적 피해를 끼치지 않는 소위 ‘착한 치매’ 환자다. 한 지인의 시어머니는 냉정하고 까다로운 분이었는데 치매를 앓으며 예의 바른 소녀처럼 변했다. 낯설어진 주변인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티 없는 아이처럼 늘 말갛게 웃었다. 요양원에 문병 갈 때마다 안 가면 안 되냐며 수줍게 붙잡던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린 그분의 남편은 드라마를 보며 ‘눈이 부으시게’ 계속 울었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드라마적 왜곡에 불쾌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치매 시어머니를 힘겹게 간병한 기억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먹고 배설하는 본능의 기억을 잊은, ‘벽에 똥칠한다’는 문장으로 표현되는 증상은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 요양원에 보낸 후에도 가족들은 심적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착하고 나쁜 치매는 없다며 우리는 고개를 떨궜다. 또 누군가의 희생적 간병이 필요한 병증일 뿐이다. 모임 때마다 화투라도 해서 치매를 예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씁쓸하게 웃었다. 기억을 작은 화투장으로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치매는 완치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환자 가족에게만 지우던 짐을 좀 더 줄이는 방법은 가능할지 모른다. 바로 더 큰 공동체, 국가와 나눠 지는 것이다. 정부는 치매국가책임제를 본격 추진하기 위해 예산을 마련하고 시행 계획을 내놓은 상태다. 치매지원센터 확대와 전문병원 설립, 요양병원 본인부담금 상한제 외에 치매 의료비의 90%를 건강보험료에서 부담하는 등 구체적인 시행안을 마련했다. 치매 환자들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려는 움직임은 질환을 둘러싼 본인과 주변인들의 고통을 나누겠다는 의미로 느껴진다. 치매 관리는 고령화 시대 의료 복지의 마중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막으려고 해도 늙음이 지름길로 오더라’는 시조의 한 구절처럼 착실히 흐르는 시간 앞에 모두가 늙는다. 늙음의 암초처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치매, 튀어버릴 기억의 파편에 모두가 너무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 거창한 묘비명이 아니더라도 고운 기억들만 남기고 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획기적인 복지로 관리받거나 의료 기술의 발달로 완치가 가능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드라마로 이슈가 된 치매에 대한 더 활발한 논의와 그에 따른 대안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이보영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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