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네댓 번쯤 얼굴을 보는 작은 모임이 있다. 다들 문학에 종사한다. 한길을 걷는 도반(道伴)인 셈이다. 애경사는 말할 것 없고, 누가 책을 출간하거나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면 소집령(?)이 떨어진다. 이런저런 명분 없이도 그저 얼굴 본 지 조금 오래다 싶을 때도 뭉친다. 회원 수칙이나 정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반상회처럼 불참 시 벌금이 부과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형편껏 참석하면 그만이다. 출석률은 나쁘지 않다. 총원 열 명 안쪽인데, 못 돼도 예닐곱 명은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어쩌다 보니 평론가 한 사람을 빼고는 다 소설가다. 그리고 모두 여성이다. 화기애애하다는 소문이 나서 이 모임을 참관하고 싶다는 이성 지인의 청도 받는다. 불순한(?) 의도라기보다 이 남다른 동지애 및 자매애를 신기해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이 팍팍 전해져서 전원이 동의하면 초대하겠다는 말로 입막음해둔다.
만나서 하는 일이래야 여느 사모임 풍경과 다르지 않다. 모처럼 한솥밥 먹고 술도 한 잔씩 곁들이며,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세상사를 종횡무진 풀어놓는다. 우리 중 제일 연장자인 L선생님의 발언이 언제나 가장 ‘핫’하다. 어찌나 맵고 짜고 달콤살벌한지 받아 적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나중에 한 동네 언저리에 둘레둘레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도 나온다. 웬만큼 진심이(라고 믿는)다.
이런 분위기를 다른 자리에서 전하면 하나같이 의아해한다. 동일 유전자를 가진 부모자식 친형제자매 간에도 가능할까 말까 할 난제인데, 하물며 까칠하고 예민하고 제멋대로일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 살고 싶어 한다고? 에이, 그야말로 소설 같은 얘기지, 한다.
우리라고 모를까. 중간에 합류한 사람도 두엇 있지만 어언 20년을 줄기차게 만나오는 동안 낯 붉힐 일이 없었다는 건 어쨌거나 대단한 조화로움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천만다행 궁합(?)이 좋았던 덕이지 싶고, 둘째는 상대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탁월한 저마다의 내공 덕이 아닌가 싶다.
나와 너의 경계를 살피고 지키는 일은 머리로 되지 않는 마음의 기술이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건, 동시에 나의 영역으로 무단 월경하지 말라는 명확한 신호이기도 하다. 소설이란 결국 인간을 탐구하는 일이며, 마침 우리는 그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문자로나마 수많은 인물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설계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작업에 숙련된지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호체계를 비교적 잘 살피고 잘 지키는 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모여 살기는 비현실적인 프로젝트다. 인간은 너무 붙어 있게 되면 삐걱대게 마련인 이기적인 생명체가 아닌가. 생의 후반부에 가까이 터 잡고 오며 가며 살고 싶은 존재들을 손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한다. 세상살이가 점점 각박해지고, 인간관계는 점점 파편화하고, 낭만과 퇴폐미를 자극하는 감성의 두 음절 ‘고독’에는 죽음의 글자 ‘사(死)’가 그림자로 따라붙는다. 너무나도 고약하고 쓸쓸한 미래다. 하여 오랜 우정에 기대 큰 그림을 그려보았을 뿐이다. 다만, ‘따로 또 같이’는 불가능하더라도 ‘따로 그리고 오래’는 가능한 나의 동지들에게 이 가을날 문득 쓰고 싶어진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마음만은 여전히 젊은 당신들이 있어서 고맙다는 것. 왠지 두둑한 뒷배라도 둔 듯 든든하다는 것.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어서 행복하다는 것.
정길연 소설가
정길연 소설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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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