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도서관에 바닷가, 돈이라곤 10원도 안 썼는데 행복하다니,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다. 비싼 교구와 책들, 옷, 고급 교육기관 앞에서 돈 때문에 갈등했던 게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아이의 반응은 엄마의 기대와 달랐다. 비싼 장난감 대신 장난감 포장 박스를 가지고 더 오래 놀고, 애써 찾아간 명승지보다 그 앞의 지렁이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이의 행복과 돈이 상관없다니, 다행스럽기도 하고, 더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2010년 여름, 아홉 살 딸아이와 다섯 살 아들을 데리고 한 달간 제주살이를 하고 돌아온 일명 ‘꽃님 에미’ 전은주 씨. 그의 이야기는 이듬해 책으로 출간됐고 제주에서 월세방을 얻어 한 달간 여행한다는 아이디어는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텔레비전, 컴퓨터, 장난감’이 없는 삼무(三無)도에서 엄마와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눈부시게 자랐다. 식당에서 “물 좀 더 주세요”도 못하던 딸 꽃님이는 낯가림이 사라졌고, 꽃님 꽃봉 남매는 친해지고 순해졌으며 명랑해졌다.
그 후로 매년 1000만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는다. ‘효리네 민박’의 성공으로 제주는 손에 잡히는 판타지가 됐다. ‘제주도 좋은 방 구하기’ 카페에 따르면 6월이 되면 ‘제주도에 한 달 살이 집이 있는지’ 묻는 전화가 하루에 10통 이상 온다고 한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 쳇바퀴에서 내려 비행기로 갈아타면 두 시간 반 만에 새로운 풍경이 시작된다. 그곳에는 바다의 내음과 오름의 정기, 바람의 노래가 두루 담겨 있다. 제주도 한 달 살기 집 ‘레이지마마’를 운영하는 이연희 씨는 ‘나는 왜 떠나려고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강추’라고 했던 맛집이 내 입맛에는 그저 그럴 수 있듯, 다른 사람들의 궤적을 따라가는 데 집중하다 보면 숨 가쁘고 조급해져 도시와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어서다.
예를 들어 아토피가 심한 아이 때문에 ‘자연식으로 생활하기’로 한 달 살기 목적을 정했다면 수확물이 많은 봄이 제일 좋다. 3월이면 순이 돋는 쑥과 달래, 각종 야생초와 자연산 산나물이 지천에 널려 있어 몸만 부지런하면 향긋한 나물과 쑥국, 쑥범벅 등으로 몸보신을 할 수 있다. 제주살이의 재미는 이삭줍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감자, 무, 당근, 콜라비, 양배추 등 다양한 밭작물의 수확이 끝나는 봄에는 크기가 고르지 않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아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로 밭에 버려진 작물이 많다. 이걸 주워 먹는 걸 이삭줍기라고 한다.
한 달 살아보기 열풍, 국내 넘어 해외로
제주가 된다면 다른 곳이 안 될 리 없다. 제주도 한 달 살기는 강원도 한 달 살기, 목포 한 달 살기 등으로 변주했다. 이는 다시 발리 한 달 살기, 치앙마이 한 달 살기, 라오스 한 달 살기 등으로 확장됐다. 일주일은 짧고 1년은 길다. 한 달, 길지도 짧지도 않은 720시간은 한 마을에서 여행객이 아닌 이방인으로 살아보기엔 적당하다. 현지인과 여행객 사이에서, 호젓하게 마을을 응시하고 떠나온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날들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섬 크레타를 여행하면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고, 김훈은 <흑산>을 쓰기 위해 경기 안산시 선감도에서 5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니가타 현에 살면서 글을 완성했다.
한국어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강점을 지닌 국내든, 잠시 다녀오기엔 아쉬운 해외든 인생에서 ‘한 달’은 길게 이어지는 인생의 영수증에서 ‘쉼표’를 한 번 찍을 기회다. 이 쉼표가 어떤 수익을 남겼는지 대차대조는 해봐야 알겠지만, 먼저 체험한 이들이 증언하는 바는 “당신도 떠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선문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게을러지라”고 한다. ‘레이지마마’는 누리집에 ‘게으른 엄마들을 위한 한 달 살기 집’을 소개한다. “아이들을 위해 너무 헌신하지 말아주세요. 살짝 방치하면 엄마도 아이도 즐겁습니다”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세계를 여행하며 ‘디지털 노마드’로 살고 있는 박기연 작가는 ‘여행하는 사업가’로 산다.
그는 자신의 책 <덜 일하고 더 행복하게 사는 법>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고등학교가 오후 3시에 끝나는 나라도 많고,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로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회식 문화가 아예 없는 나라도 많다”고 썼다. 다른 도시에서 살아보는 경험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에 대해 시야를 넓히고 관점을 확대해 의문을 가져보는” 기회가 된다. 그러려면 일단 게을러져야 한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내려 다른 나라의 쳇바퀴를 보면서 그 틈바구니를 살필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영화 ‘치킨런’을 보면 양계장에 사는 닭은 울타리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에게 주어진 길은 치킨이 되는 것뿐이다. 상상하려면 일단 울타리 밖으로 나와야 한다. 경쟁이 전부인 나라에 살던 이들은 학업도 취업도 출산도 육아도 모두 경쟁한다. 그러다 ‘한 달’을 쉬어보면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게 정말 전부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생의 전환점은 의외로 빈둥거리는 시간에 찾아온다. 당연하다 여겼던 삶의 트랙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하면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는 성공이다.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