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녁이면, 가을이면, 연말이면 ‘그때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일은 차라리 맡지 말걸’이라는 후회를 달고 사는 나는, 사실 ‘후회 없는 삶’이라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할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이 작가는 정말 후회 없는 삶을 살았구나, 후회 때문에 삶을 저당잡히지 않았구나’ 하는 부러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소로의 <월든>을 읽을 때,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을 때, 나는 ‘이 작가들은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구나’ 하는 감동에 휩싸인다. 최근에는 올해 출간된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며 그런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와 싸우며 고통 속에 사라질지라도, 후회 없는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이 책은 철학자 김진영이 암 선고를 받고 1년 후 세상을 떠나기 3일 전까지 쓴 일기를 모은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일기가 아닌 사랑에 대한 철학서이며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담은 에세이기도 하다. 그는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압박 속에서도 이렇게 해맑은 여유를 보여준다.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이 없다. 남겨진 사랑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그걸 다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이 없다는 것, 남겨진 시간을 오직 ‘사랑’을 위해 쓰자는 굳건한 결심. 그것이 이 아름다운 책을 관통하는 철학의 주제이자 사랑의 열정이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장을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라는 선고를 받고도 이토록 초연함을 지켜낼 수 있는 철학자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그는 슬픔보다 더 소중한 것들, 슬픔보다 더 강인한 것들을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나는 깊이 병들어도 사랑의 주체다. 울 것 없다. 그러면 됐으니까.” 이 문장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져버렸다. 그렇다. 누구나 살면서 가끔씩 후회를 할 수는 있지만 후회 속에 삶을 마감해서는 안 된다. 사랑할 권리, 살아낼 권리, 삶을 끝까지 견뎌낼 권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생의 끝까지 삶을 사랑했음을, 내 삶에서 소중한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슬픔보다 더 중요한 것, 울고불고 원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깊이 병들었어도, 고통이 온몸을 휘감아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나를 발견하는 것.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바로 내가 진정한 사랑의 주체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했던 한 철학자가 자신의 삶에 바치는 최고의 헌사였다.
어떤 고통의 순간 앞에서도 오직 ‘사랑할 권리’를 잃지 않는 것,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랑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 눈에 보이지 않거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해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우리의 삶은 오늘 불완전한 바로 이 상태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직 사랑할 권리가 있으니까. 아직 사랑할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문장들을 읽고, 쓰다듬고, 껴안을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정여울│문학평론가. <내성적인 여행자>,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저자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