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쥬라기 공원’(1993)에는 6500만 년 전 멸종한 공룡 유전자로 공룡을 복제하는 유전학자가 나온다. 공룡 유전자는 호박 속에 들어 있는 모기 화석에서 회수됐다. 모기가 죽기 직전 공룡의 피를 빨았고, 그 공룡 피 속에는 공룡 유전자가 들어 있었다. 영화는 미국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이보다 3년 전인 1990년에 내놓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당시 싹트기 시작한 고대 DNA 분야를 접하고, 여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만들었다.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를 쓴 스반테 페보가 바로 고대 DNA 서열을 읽어내는 유전학자다. 이 스웨덴인은 이 분야를 개척하다시피 했다. 그의 최대 성과는 3만 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서열을 알아낸 것이다. 2010년 일이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데니소바인 화석 주인공이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오래된 고인류라는 것도 확인했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다.
한국인에도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섞여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1857년 독일 서부 뒤셀도르프 인근 네안데르 계곡(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고(古)인류 화석이다. 오래도록 그 중요성을 몰라 방치됐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스페인, 크로아티아, 프랑스 등 유럽 곳곳에서 살았다. 대표적인 화석이 독일에서 나왔기에, 독일인은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서열을 독일 기초과학연구소가 알아냈다는 건, 학문적 자부심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스반테 페보는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막스플랑크 소사이어티 산하 진화인류학연구소 소장이다.
인류학계는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베이징 원인 등 직립원인)의 관계를 놓고 갈라졌었다.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가 현생인류의 선조인가라는 것이 쟁점이었다. 이는 현생인류 아프리카 기원설, 현생인류 다(多)지역 기원설이란 용어로 표현된다. 다지역 기원설은 유럽, 아시아 등에서 고인류(직립원인, 호모 에렉투스)가 각각 현생인류인 유럽인, 아시아인으로 진화했다는 설이다. 현생인류 아프리카 기원설은 인간의 진화상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 고릴라가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살고 있는 데 착안, 인간도 이 땅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1980년대 들어 유전학으로 무장한 인류유전학자가 등장하면서 이 오래된 문제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미국 버클리대 유전학자 앨런 윌슨은 지구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유전자를 분석했고, 인류는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온 사람들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이제 남은 건 네안데르탈인은 왜 사라졌느냐,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에 유전자를 일부 전했느냐이다. 스반테 페보가 해결한 건 이 두 번째 문제다.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이종(異種)교배를 했고, 그게 우리 현생인류의 게놈 안에서 확인되느냐다. 현생인류 게놈의 4~6%가 네안데르탈인에게서 건너왔다는 내용의 스반테 페보 연구 그룹 논문은 2010년 5월 7일 학술 저널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그 파장은 컸다. <사이언스> 사이트에 나와 있는 해당 논문 초록은 이렇다.
“우리(연구자 56명)는 네안데르탈인 3명의 40억 개 이상 뉴클레오티드로 구성된 네안데르탈인 게놈 서열의 초안을 제시한다. 네안데르탈인 게놈과 세계 여러 곳에서 온 현생인류 5명의 게놈을 비교했다. 현생인류가 긍정적인 선택의 영향을 받은 듯한 게놈 지역을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신진대사, 인지 및 두개골 발전에 관여하는 유전자도 포함돼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유전적 변이를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인보다는 오늘날 유라시아인과 더 공유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비아프리카인 조상에게 흘러갔으며, 이 일은 유라시아인이 각기 흩어져 살기 이전에 일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논문 초록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한국인과 관련된 새로운 내용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비(非)아프리카인 조상에게 흘러갔으며, 이 일은 유라시아인이 각기 흩어져 살기 이전에 일어났다’라는 부분이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사는 한국인에도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섞여 있다고 확인한다. 동아시아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다는 얘기가 없었다. 스반테 페보에 따르면,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6만 년 전 빠져나온 직후 중동과 아라비아 반도 인근 지역에서 그곳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만났다. 그때 네안데르탈인과 유전자를 주고받았고, 그런 현생인류가 이후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스반테 페보 연구를 접한 이상, 한국인도 네안데르탈인이 완전히 남의 일이라고 무심할 수는 없게 됐다.
미라 송아지 간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
오래된 생물에서 유전자가 남아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인체 DNA는 사망 직후 파괴되기 시작한다. 세포 속에 들어 있는 효소들이 DNA를 망가트리기 시작해 사망 후 몇 시간, 때로는 며칠 내에 몸 안의 DNA 가닥들이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끊어져나간다.
스반테 페보가 고 DNA 연구에 빠져든 건 어려서 엄마 손을 잡고 다녀온 이집트 여행이 계기가 됐다. 스반테 페보는 이후 이집트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집트학이 생각보다 역동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의대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스웨덴 웁살라대학 의대 박사과정에서도 이집트학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이집트학과 의학 연구의 접점을 찾았다. 그러던 중 오래된 미라에서 DNA를 추출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고 DNA 연구가 어느 정도 돼 있는지 학술지를 뒤적였으나 전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지도교수 몰래 송아지 간을 사다가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던 방법을 모방해 50도로 가열한 오븐에 넣고 미라로 만들었다. 페보는 이 미라 송아지 간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 실제 이집트 미라를 대상으로 DNA 추출을 시도했다. 이게 위대한 학문적 성과의 출발점이었다.
책에는 그의 아픈 개인사도 있다. 그는 혼외자였다. 아버지는 노벨의학상 수상자였다. 1982년 프로스타글란딘을 발견한 수네 베르스트룀. 아버지는 두 집 살림을 했고, 스반테 페보에 따르면 “한 가족은 다른 가족의 존재를 몰랐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것을 슬퍼했고, 그래서인지 그의 세 살짜리 아들이 성장했을 때 곁에 있고 싶은 바람이 간절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2004년에 숨졌고,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으나 아들은 위대한 과학자 반열에 들어섰다.
한 가지 더 빼놓은 게 있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공룡 유전자 회수와 공룡 복제 건이다. 스반테 페보는 6500만 년 전 생물의 유전자는 거의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영화 원작이 나온 1990년대 초 일부 논문이 학술 저널에 쏟아졌다. 호박 속에서 발견된 흰개미 등등의 유전자 서열을 일부 회수했다고 저자들은 주장했다. 스반테 페보는 이 유전자 서열은 그 동물의 것이 아닌 후대 생물 또는 사람의 유전자일 것으로 본다. 영화는 상상 속 이야기일 뿐이다.
최준석 | 주간조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