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생각하면서 사는 존재다. 생각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사상을 갖고 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철학을 갖고 살게 되어 있음이다. 철학 속에서 철학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같은 시대와 사회에 공존하는 민족도 그들의 철학을 갖고 사는 법이다. 우리도 그렇다. 내가 살아온 한 세기의 역사적 삶도 그랬다. 그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랬다.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시대였다. 모든 신생국가와 후진국가가 겪어야 했던 과정이었다. 권력과 경제는 물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힘을 가진 자와 계층이 못 가진 사람들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군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도 그랬다. 나는 지금도 이승만 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받고 있던 이기붕에게 “나는 군을 장악하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경찰을 쥐고 있으면 자유당 정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북한에 갔을 때, 김정일이 한 말이 전해졌다. “당신네는 5년마다 한 번씩 정권이 바뀌니까 내가 믿을 수가 없지만, 인민공화국은 선군정책이기 때문에 내가 군대를 통솔하고 있는 동안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창피스러운 지도자의 발언이 없으나, 그것이 북한에서는 상식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갑질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정도다. 그 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4·19혁명이 있었고 민주화 투쟁을 겪었다. 그 결과로 ‘제2의 국가’로 올라섰다. 그것이 법이 지배하는 법치사회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민정부로부터 지금까지는 모든 민주국가와 같은 나라다운 국가를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준법자와 불법자의 관계로 바뀐다.
그리고 군이나 경찰이 앞장서는 국가가 아닌 정부가 법에 따라 정치다운 정치를 통해 국민의 가치 있는 삶을 도모하게 된다. 옛날 같으면 무(武)가 앞섰으나 문(文)이, 즉 법이 기반이 되는 사회가 된다. 우리가 지금 책임 맡고 있는 정치사회적 과제가 바로 그 법치국가의 건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면서 키워가는 책임을 정부가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과 법치국가의 기본 가치가 되는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것에 대한 대답이다. 정의의 관념과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사회의 정치 및 사회적 삶에 변화가 발생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현존하는 사회는 어떤 정의관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정의라고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20세기를 휩쓸었던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정의철학은 그 방향이 확실했다. 정의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수단과 열쇠가 되는 가치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중심과제는 경제적 평등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적 삶의 보편적인 평준화로 가는 길이었다. 모든 좌파정치의 목표가 그 방향을 택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한때는 중·고등학교 교육의 평준화는 필수적이며, 국립대학의 평준화를 거쳐 사립대학의 평준화까지 가는 것이 교육의 국가적 과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지금은 대학의 경쟁이 지성사회의 우열을 가리며 국제적 지도력의 핵심임을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과 미국의 유럽에 대한 지도력이 대학 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미국 같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정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들은 더 많은 사람이 보다 많은 인간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정의라고 믿고 있다. 자유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자라며, 그 결과를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것을 정의의 책임이라고 본다. 나는 지금도 한 미국 교수에게 질문했다가 망신스러운 대답을 들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김 교수의 말대로 불행한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서 총기 소유나 사용을 규제하거나 법으로 제재하는 일은 곧 집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꿈은 총기를 갖고 싶은 사람이 다 소유하더라도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습니다”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 같은 사람은 오래전부터 정의는 인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라고 믿어왔다. 그것은 모든 종교와 도덕의 근본정신이 인간 목적관과 인간애에 있기 때문이다. 석가, 공자,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러했고, 3000년의 긴 철학의 역사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온 까닭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찾아 누릴 수 있는가를 염원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사상을 정리해보며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법치사회의 한계를 넘어 더 높은 차원의 ‘제3의 국가’로 진출하게 된다. 그런 사회를 우리는 질서사회로 보며 따르고 있다. 우리가 선진국가라고 생각하는 행복지수가 높은 사회는 바로 그런 사회와 국가이다. 개인들이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이며 양심의 가치가 법의 규범보다 높이 평가받는 사회이다. 정치의 영역이 축소되고 윤리적인 질서가 자리 잡힌 국가이다.
그런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악이 적거나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스위스나 캐나다에 가 머물러보면 그런 사회는 법치사회가 아닌 질서사회임을 느끼며 부러워지곤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정치보다는 종교적 가치와 인륜적 질서가 대신해주고 있다. ‘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살기 부끄러운 사회이다.
몇 십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는 우리도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은 소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큰 나라에 가면 상위층 사람들이 그 질서를 유지해준다. 그러나 크지 않은 중견국가에서는 국민 대다수가 그런 질서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두 가지 질서사회를 위한 권고와 요청을 해오고 있다.
닫힌 사회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 사회 성장의 기본질서는 열린 사회를 개척해가는 데 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생명력을 상실하는 종교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참 신앙은 인간애의 사명이기 때문에 항상 생명력을 갖춘 창조적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이다.
우리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서는 법치사회를 넘어서는 질서사회가 찾아올 것이며, 그런 사회는 인간애(사랑)의 나무와 같아서 자유와 평등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