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식품 코너를 돌고 있을 때였다. 냉기 샤워를 받으며 얌전히 누워 있는 잎채소를 가리키며 젊은 여자가 해맑게 말했다.
“쑥갓이 너무 크다.”
남자가 여자를 쓱 돌아보더니 자신만만한 얼굴로 정정해주었다.
“저건 쑥갓이 아니야. 근대야, 근대.”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쑥갓도 아니고 근대도 아니고 아욱이라는 것이다’ 하고 참견질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자가 ‘우와 그걸 알아, 대단한데?’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바람에 나는 얼른 카트를 밀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까짓 거 몰라도 상관없지, 뭐.’
농업 유관 기관이 기획한 지방 출장 행사에 어찌어찌 동참한 적이 있다. 참석자들 면면이 농학계의 엘리트들이거나 농업 경영 실무 전문가들이어서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자리에서 툭툭 오가는 한마디 한마디가 공부였다. 새벽부터 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서 점심 예약이 된 토속음식점에 도착했을 때다. 토담집 낮은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이 그림처럼 푸르게 펼쳐졌다. 바람이 부는지 빈터를 뒤덮은 초본식물들이 카드섹션을 하듯 한꺼번에 옆으로 누웠다 일어서곤 했다. 맞은편의 누군가가 말했다.
“저거, 보리인가?”
“글쎄, 밀인 것 같은데요?”
나는 두 분을 안 보는 척 훔쳐보고 다시 창밖을 확인한 뒤 고개를 숙였다. 사실 좀 당황했다. 그분들은 농업계의 인재들이다. 함께 이동하는 동안 그분들의 자부심과 열정과 진심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는 ‘아, 연구실과 현장은 멀고도 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농작물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서 땅을 뚫고 나오는 모든 식물군을 두루 꿸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그분들이라면 창밖의 생명체가 보리도 밀도 아닌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쯤, 굳이 이름을 찾아주자면 벼과의 ‘그령’에 해당한다는 사실쯤 너끈히 알 거라는 나의 기대가 살짝 어그러졌을 뿐이다.
후박나무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한다. 후박나무는 녹나뭇과의 상록활엽교목이다. 우리가 흔히 후박나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나무는 목련과의 낙엽활엽교목이다. 정확하게는 일본 목련인데, 원산지인 일본에서 후박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긴 오류다. 잘 아는 편집자의 부탁으로 출판을 앞둔 타인의 원고를 미리 읽어볼 일이 있었다. 본문에 후박나무가 나오는데 생태 묘사로 보아 분명 일본 목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원작자에게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고 일본 목련이라는 명칭이 내키지 않으면 아쉽더라도 목련 정도로 순화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내용에 영향이 없을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이 읽을 책이므로 올바른 정보 전달이 중요하다는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 작가는 기어이 후박나무를 고집했다. 아마도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살다 보면 저절로 아는 것이 하나둘 늘고, 사는 데 지장이 있다 싶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찾아서 배우게 된다. 그래도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무지를 깨닫고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릇된 지식이나 사고를 무책임하게 전파함으로써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음에도 끝끝내 철회하지 않는 독선에 절망한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컴컴하다. 자기 눈을 감고 흰 것을 검다고 우기는 사람과 더러 마주쳐왔다. 새해에는 두 눈을 맑게 뜨고 자기 안의 무지와 독선을 경계하는 아름다운 사람과 자주 마주하고 싶다.
정길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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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