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선배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지난 한 해의 일기가 첨부돼 있었다. 오랜만에 온 연락이라 반가운 마음에 즉각 답장을 보냈다. 몇 가지 안부를 쓴 후, “환갑을 맞이하는 기분이 어떠신지?” 하고 물었다. 선배는 이른바 ‘58년 개띠’이다.
‘58년 개띠’는 다른 해보다 유명한 해이다. ‘58년 개띠’라는 말은 아예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해에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해에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동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58년 개띠’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그해에 가장 많은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에 태어난 아이가 9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작년 신생아 수가 40만 명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아이가 태어났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58년 개띠’를 만날 수 있었고, 자연스레 ‘58년 개띠’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올해는 그 ‘58년 개띠’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다. 선배에게 환갑을 맞이하는 소감을 물은 이유였다. 비단 ‘58년 개띠’만이겠는가. 우리나라의 최근 현대사는 굵직한 변화들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사람이 그 변화의 현장에 직접 참여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이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염원했다. 올해 환갑을 맞는 선배에게 그 숱한 변화를 겪은 감회를 듣고 싶었다. 선배의 대답은 간명했다. “무술년에 태어나 삶의 수레를 한 바퀴 굴린 셈이지.”
10년 전, 선배는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한 상황에 처했었다. 다행히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아 목숨은 건졌지만 몸의 절반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쉼 없이 재활해 몸을 회복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선배는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삶을 이끌어주는 철학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삶을 수레라 한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얻은 결론이리라. 수레는 제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후퇴한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런 사실을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우리는 삶의 수레를 밀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보람일 테니까.
선배가 보내준 일기를 열어보았다. 하루하루를 기록한 건 아니었다. 소소한 삶의 일상을 기록한 것도 아니었다. 모임을 만들어 함께 고전을 읽은 이야기, 함께 고전을 읽는 사람들과 여행한 이야기, 새롭게 읽은 책 이야기 등등. 삶을 이끌어주는 철학을 만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대한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미암 유희춘은 조선 중종 8년(1513년)에 태어나 선조 10년(1577년)까지 살았다. 65년의 인생 중 20년은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그렇게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 유배가 풀린 때부터 죽을 때까지 10년간 나날의 삶을 일기에 담았다. 훗날 공개될 수도 있음을 알았겠지만,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그래서 〈미암일기〉는 16세기 선비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죽기 이틀 전의 기록으로 끝난다. 하루 전날에는 몸이 너무 아파 일기를 쓰지 못했던 것이다. 삶이 다하는 순간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오는 듯했다. 일기는 내용보다 그것을 쓰는 자세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며 삶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유희춘은 동서분당이 시작되는 때 살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미암일기〉를 통해 유희춘이 삶의 수레를 앞으로 밀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삶의 수레를 앞으로 밀고 싶어 한다. 살아가면서 문뜩문뜩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게 그 증거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가? 올바른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고, 생각에 생각을 보태봐도 답은 막연하다. 공자는 “생각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했다. 삶에는 배움 또한 필요하다. 이때 배움은 ‘앎’을 의미한다. ‘삶’은 ‘앎’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올바른 앎이 있어야 올바른 삶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앎’이란 무엇인가? 책을 몇 권 읽었다고, 저명한 학자의 강연을 들었다고 앎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을 조금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는 배우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고도 했다. 앎을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앎을 실천과 연관 지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앎이 앎에 그쳐서는 삶을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실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앎은 맹목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앎이 없는 삶은 공허할 뿐이다. 앎과 실천이 연결돼야 삶의 수레는 앞으로 굴러간다.
시계를 1400년 전으로 돌려 한 인물을 만나보자. 원효는 617년에 신라에서 태어났다. 원효는 9세 때 절에 들어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모가 절에 들여보냈다. 아마도 자식이 편안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원효는 6두품 출신이므로 크게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불교 국가였기 때문에 스님에 대한 처우가 달랐다. 그래서 일찍이 부모가 그를 절에 들여보냈던 것이리라.
그러면 원효는 안락한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10대 때 지었다는 ‘발심수행장’의 내용을 보자. “시간은 흘러 흘러 빠르게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간다. 한 달 한 달 지내다 보니 홀연 연말이 되고, 한 해 한 해 흘러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분발해야 한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리더라도 불기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주린 창자가 마치 끊어지듯 하더라도 음식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백 년도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않는다 말할 것이며, 수행하지 않고 놀기만 할 것인가.”
그렇게 대단한 결심을 했다. 원효는 당대 제1의 학승이었다. 그가 쓴 책이 무려 24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금강삼매경>이 전해졌을 때 아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효만이 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원효가 책만 읽는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리고 앎을 실천과 연결 지었다.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은 후 파계를 했다. ‘무애(無?)’라 이름 붙인 바가지탈을 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춤추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무애’란 막힘이나 거침이 없다는 말이다. 원효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누구나 올바른 앎을 얻어 삶의 수레를 굴릴 수 있음을 나누고자 했다.
원효는 말한다. “하나의 울타리 안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벗어나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의 울타리 안’이란 일상생활을 말한다. 일상생활에 매몰되면 ‘앎’을 얻을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면 ‘이상주의자’가 될 뿐이다. 일상생활에 매몰되지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바른 생각을 해보라. 삶의 수레를 앞으로 굴리는 앎은 멀리 있지 않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에 있다.
홍승기│작가. <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