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식당이 한 달간 문을 닫았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휴점하오니 고객님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식당 건물을 도배하다시피 걸린 대형 배너에 적힌 안내 문구는 이랬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테리어를 얼마나 더 멋지게 바꾸려고 잘되던 식당 문을 다 닫나? 그 앞을 지나면서 몇 번인가는, 궁금증 내지는 기대감으로 불 꺼진 건물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게 아니었다. 절반을 차지하던 좌식 테이블 공간을 입식으로 바꾼 게 인테리어의 전부였다.
“요즘 사람들이 의자에만 앉으려고 하지, 바닥에는 앉기 싫어하잖아요. 자리가 있는데도 신발 벗기 귀찮다고 그냥 가는 손님들이 있어요.”
식당 주인장의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부터도 회식 자리 같은 불가피한 상황을 제하고는, 최근 들어 좌식 테이블에 앉아본 일이 거의 없다. 신발을 벗고 신는 수고도 수고지만,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는 치마 때문에 불편해하고, 슈트를 입은 남자는 무릎이며 바짓단이 처참하게 구겨지는 낭패를 감수해야 하니 꺼린다. 식사 자리가 길어지면 저리는 다리와 쑤시는 허리를 어쩌지 못해 몸을 배배 꼬는 이도 등장한다. 좌식 테이블 자리는 본의 아니게 하체 혈액순환과 척추 기립근을 테스트하는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앉은 자세가 참 일관되게 꼿꼿하시네요. 허리 힘이 좋으신가 봐요.” 내가 이런 치하를 들은 장소는 스포츠센터가 아니라 뜻밖에도 식당에서였다.
우리의 좌식 문화는 온돌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다. 따뜻한 구들장의 수혜를 극대화하고자 방바닥에 누워 자고, 방바닥에 앉아 먹고 공부하고 여가를 보내는 생활문화가 정착됐다. 하지만 이제는 장작 패서 불 때는 시대도 아니고, 아랫목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난방 수단이 다양해지고 난방 효율도 높아졌다. 아랫목의 가치는 희석되고, 오히려 허리와 무릎에 부담을 주는 자세라는 단점이 부각된다.
좌식 문화의 본좌(?) 격인 사찰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감지된다. 교회나 성당에서 흔히 보는 ‘예배 의자’를 비치한 입식(立式) 법당이 ‘보살님’들의 환호 속에 속속 들어서고 있다. 오랜 참선 수행에 무릎이 나갔을 게 빤한 노스님들을 위해서도 천만다행한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예수회 수사인 카를 라너(Karl Rahner)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가 함유하고 있는 영성적 측면을 풀이한 책 〈신학 단상〉을 통해 앉음의 의미를 “인간 본연의 충만하고 결정적인 자리를 향한 귀정(歸正)의 경험”으로 표현했다. 인간은 앉음을 통해 헛된 소란과 목표의식에서 벗어나 평정을 경험한다. 걷거나 서 있는 자세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휴식과 안도감이며, 차분하고 조용한 마음을 익히고 기르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면, 나는 유전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지게 된 양반다리의 재능(?)이 이대로 소멸되기에는 아깝다는 기분으로 서성이게 된다. 의식이 차분하면서도 명료하게 착 가라앉는 맛은 의자에 앉아서는 어렵고, 양 무릎과 꼬리뼈가 삼각형을 이루어 하단전을 단단하게 떠받히는 좌법(坐法)에서만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참선 초보자의 편견이 있다. 좌법이 이루어낸 깊은 안정감 속에 참선자의 모습은 부도탑처럼 단아하고 태산처럼 진중해진다. 물론 30분만 지나도 의식이 온통 불편한 허리며 다리, 무릎, 발가락에만 쏠린다는 게 문제지만. 암튼 어떤 식으로든 앉을 자리를 잘 살펴서, 잘 앉을 일이다.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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