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는 양희은과 김민기(왼쪽) ⓒ조선DB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중략)’
만 번도 넘게 읊조렸다. 그래서 더 각별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덤덤하게 부르는 것처럼 보여도 수십 년간 내 안의 흐름이 온전히 담긴 노래다. 데뷔곡 ‘아침이슬’은 1975년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대중운동의 대표곡이 됐다. 괴로웠다. 이 노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이슬’을 넘어선 노래를 발표해야 한다는 강박도 생겼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었다. 노래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큰 무게로 자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모든 노래가 장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또 어떤가. 비로소 그 무게를 떨칠 수 있었다.
1971년 운명처럼 ‘아침이슬’을 만났다. 열아홉 살, 음악감상실 ‘오비스 캐빈’에서 노래를 할 때였다. ‘오비스 캐빈’은 통기타 가수 1세대들이 노래하던 메카였다. 날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 노래가 거리의 상징이 될 줄은 몰랐다. 노래를 만든 김민기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절감한 순간이 있다. 민주화운동이 뜨거웠던 어느 날, 난 우연히 시위 대열에 섞였다. 대열에서 빠져나왔을 때 ‘아침이슬’이 들려왔다. 시위대는 ‘떼창’을 하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이게 뭐지? 이 노래가 왜 이렇게 들리지?’ 내가 서정에 겨워 부르던 것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아침이슬’은 더 이상 내가 부르던 그 노래가 아니었다.
‘상록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록수’의 원래 제목은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으로, 축가로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형편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살림만 합친 공단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들을 안쓰럽게 여긴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은 합동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했다. 김민기 씨가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자며 내게 노래 불러줄 것을 권했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가사의 화자 ‘우리’는 부부 또는 친구를 의미했다. 결혼이라는 일엽편주에 오른 두 사람이 함께 거친 파도와 싸워 이겨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축가는 뜻밖의 비장함을 입게 됐다.
그래, 운명이었다. 그 노래들은 거리에 선택됐다. 만든 이와 처음 부른 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랑받았지만 결국 노래는 되불러주는 이의 것이었다. 노래는 위로요, 공감이었다. 노래는 마음을 어루만질 때, 마음을 관통할 때 힘을 얻는다. 대중은 그 노래들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단란했던 추억이 담긴 노래 ‘백구’가 내게 그렇듯 말이다. 무대에 선 지 48년이 됐다. 노래를 좋아하던 어린아이는 노래를 통해 어려웠던 환경을 위로하고 치유했다. 세상으로 나오면서 아파도, 하기 싫어도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노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걸 찾는 데까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담백하고 선선하게 삶을 노래한다. 30대, 40대, 50대가 다르듯 변하는 인생의 시계 속에서 그때의 나를 담는다. 듣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나아갈 뿐이다. 노래가 주는 힘은 되불러주는 사람의 몫으로 남긴 채.
양희은│가수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