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운동을 세계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유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1960)│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1919년 4월 16일 아침 서울 주재 미국 영사 커티스는 선교사인 언더우드, AP통신 서울 특파원인 테일러 등과 함께 경기도 수원시 장안면 수촌리를 향해 출발했다. 일본군이 수촌리에서 인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직접 확인하러 나선 것이다.
커티스 영사 일행은 수촌리에서 가장 가까운 장터인 수원군 향남면 발안장을 눈앞에 두고 잠시 멈춰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 저 멀리 발안장에서 1km쯤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 뒤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어가 능숙한 언더우드가 가까운 민가를 찾아가 발안리 너머의 연기에 대해 물었다. 주민들은 전날인 4월 15일 오후부터 향남면 제암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커티스 영사 일행은 끔찍한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우연히 목격했다. 그리고 3·1운동은 제암리 학살 사건을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경기 화성시 향남읍 ‘화성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한겨레
교회에 불러 모아 총 쏘고 불 질러
1919년 3월 31일 발안리 장날에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날 시위대는 일본인이 다니는 소학교, 우편국,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사흘 후인 4월 3일에는 장안면 수촌리와 우정면 화수리에서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이날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가 몰매를 맞아 죽었고 화수리 주재소가 불탔다.
헌병과 군대가 바로 보복에 나섰다. 헌병들은 수촌리에 방화를 저질렀다. 군인들은 발안리, 수촌리, 화수리를 다니며 200여 명을 검거했다. 4월 13일에는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리에 나타나 3월 31일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이틀 후인 4월 15일 아리타 부대가 제암리에 나타났다. 그리고 제암리 주민들을 윽박질러 15세 이상 남성들을 제암교회에 모이도록 했다.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남성들이 교회에 모이자 아리타 중위는 밖으로 나와 사격 명령을 내렸다. 교회를 포위한 군인들은 창문을 통해 사격했다. 사격이 끝난 후 짚 더미에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다. 바람이 세게 불면서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붙었다. 교회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했다. 군인들은 다시 마을 건너편 팔탄면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했다. 이날 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모두 29명이다. 교회 안에서 19명, 밖에서 4명이 죽었다. 고주리에서는 6명이 죽었다. 29명 중 기독교인은 12명, 천도교인은 17명이었다.
▶1919년 제암리에서 일제 강점에 맞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제암리교회에서 학살당한 23명의 순국열사 중 안종락(사망 당시 54살·왼쪽) 선생의 생전사진│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식민지배 저항 민중 학살’로 결론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비극의 현장을 목격한 커티스 영사는 버그홀츠 총영사에게 학살 현장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언더우드의 주민 면담 보고서도 함께 냈다. 4월 23일 버그홀츠는 미국 국무장관 앞으로 ‘일본군이 교회 안에서 한국인 37명 학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를 보강해 5월 12일 다시 보고서를 내면서 버그홀츠는 제암리 학살 사건을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에 대한 학살 사건으로 정의했다. 이처럼 미국 국무부는 서울 주재 영사관의 공식 보고를 통해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일본의 학살에 항의하는 외교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4월 16일 커티스 영사 일행이 제암리 학살 현장을 다녀오면서 그 참상이 알려지자 영국과 프랑스 영사관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영국 영사관에서는 4월 18일 현장 조사를 다녀와 곧바로 조선총독부에 문제를 제기했다. 4월 19일에는 로이즈 영사가 직접 선교사들과 기자를 이끌고 현장을 방문한 뒤 그 결과를 주일 영국대사관에 보고했다. 주일 영국대사 그린경은 5월 5일자로 영국 외무성에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해 보고했다. 주일 영국 대리공사 얼스턴은 일본 외무차관인 시데하라를 찾아가 일본 군경에 의한 학살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잔학성은 과장된 것이라며 학살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자 얼스턴은 영국 외무성에 두 가지 요청을 했다. 먼저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에 문명 세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강렬한 공포감을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승전국의 일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일본 대표에게 일본군의 잔학성이 알려질 경우 그것이 회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 역시 일본에 대한 외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 영사관에서도 주서울 부영사인 갈루아가 1919년 5월 20일 주일 프랑스 대사 바스트와 외무장관 피숑에게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갈루아는 한국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의 피해자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서울에 자리한 미국, 영국, 프랑스 영사관들은 제암리 학살 사건을 상세히 본국 정부에 보고했고 인도적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에 항의했으며 민간 차원의 모금을 통해 피해자를 도왔다. 하지만 본국 정부들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에 대해 외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화성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추모제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의 보복으로 집단 학살당한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게시판이 놓여 있다.│한겨레
일본서 발행 영자지 ‘쇼킹한 만행’ 기사
본국 정부가 외교 조치를 외면하는 동안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본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한편, 영자신문에 투고해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데 힘썼다. 3·1운동 첫날부터 시위 장면을 찍었던 장로교 선교사 스코필드는 4월 17일에 제암리 학살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18일 제암리로 찾아가 현장 사진을 찍고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를 남겼다. 수촌리 학살에 관해서도 ‘수촌리 학살 사건 보고서’를 남겼다. 그는 이 보고서들을 비밀리에 선교본부에 보내고 영자신문에 익명으로 기고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인 〈상하이 가제트〉는 5월 27일자에 익명으로 ‘수원 제암리 대학살’과 ‘수촌의 연소’라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 내용이 스코필드의 두 보고서와 같았다.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최초의 영자신문 보도는 일본 고베에서 발행되던 〈재팬 크로니클〉 4월 20일자에 실린 ‘수원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간략한 기사였다. 이 신문은 4월 29일자에도 ‘쇼킹한 만행, 한 기독교 예배당에서 대학살’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5월 3일자에서는 ‘팔탄면 대학살 보고’라는 제목으로 언더우드의 주민 면담 보고서를 상세히 인용해 보도했다. 영국 영사와 함께 제암리 현장을 방문했던 〈재팬 애드버타이저〉 특파원은 4월 24일자로 소식을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서양인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에 주목하자 조선총독부가 학살 흔적을 급히 없애려 했다.
서양에 제암리 학살 사건을 알린 것은 서울발 AP통신을 인용 보도한 미국의 뉴욕타임스 4월 24일자 기사였다.
“조선총독은 일본군이 서울 동남방 45마일의 촌락에서 남성 기독교인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총살하고 대검으로 찔러 무참히 죽였다는 비난을 받고 있어 진상을 조사 중이다. 또한 일본군은 만행 후 그 마을의 교회와 그 밖의 건물들을 불태워 없앴다고도 한다.”
서양에 3·1운동을 처음 알린 언론도 뉴욕타임스였다. 1919년 4월 17일자 기사는 임시정부인 한성정부 수립 소식을 알렸고 한국인의 만세시위를 ‘평화시위’ ‘평화혁명’이라 불렀다. 이러한 관심과 보도 속에 미국 상원에서는 “미합중국 상원의원은 한국인들이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정부를 위한 열망에 동정을 표하는 바이다”라는 결의안이 상정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서양 열강과 일본이 함께한 이 협상 테이블에서 비록 공식적인 안건으로 상정되지는 않았지만, 제암리 학살 사건을 비롯한 3·1운동 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학상은 일본 대표를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서양 열강에 3·1운동은 억압받는 약자의 정의로운 항거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많은 한국인은 다음과 같이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의 모든 신문이 우리의 대규모 대중 시위를 보도할 것이다. 열강들이 베르사유에서 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조선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양심이 눈을 뜰 것이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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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