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학교 기숙사 뒷산과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친 당시 배화여고 학생 여섯 명. 왼쪽부터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국가보훈처
‘선언서의 배포와 학생들의 선동에 따라 하층민은 물론 청년 학생들도 조선은 독립될 것이라고 믿는 자가 있었고 상류층도 한때 반신반의에 빠졌으며,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이를 믿었기 때문에 운동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가 진단한 3·1운동의 확산 원인은 학생의 선동이었다. 서울로 유학을 오거나 지방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각종 선언서, 유인물 그리고 시위 경험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학생운동은 민족 차별에 분노한 학생이 거리로 나선 3·1운동에서 처음 등장했다. 3·1운동의 모의 단계부터 학생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이 3·1운동을 촉발하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도쿄 유학생들은 자신들만의 2·8독립선언을 모의하지 않았다. 독립선언을 준비하면서 와세다대학 학생인 송계백을 국내로 밀파했다.
전문학교들 대표 뽑아 조직적 계획
송계백은 1919년 1월 하순경에 서울에 도착했다. 보성중학교 출신인 송계백은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인 최린, 보성중학교 선배이자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 그리고 최남선을 만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여주었다. 최린은 손병희에게 초안을 보여주었다.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이같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에 우리 선배들로서 좌시할 수 없다”며 독립운동 준비에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1919년 1월 말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1월 26일 경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 등이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인 주익, 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 등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문제를 논의했다. 2월에 들어서는 주익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전문학교 학생을 동원해 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2월 20일에는 전문학교별 대표를 뽑고 대표자들이 체포될 경우에 대비해 시위를 이끌어갈 책임자도 정했다.
2월 22일 박희도가 전문학교 대표들에게 종교계가 독립시위를 벌일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렸다. 2월 25일에는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종교계 주도의 독립선언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문학교 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3월 1일에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탑골공원에서 독립시위를 벌이되, 3월 5일에는 학생만의 독자적 시위를 전개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급한 건 중등학교 학생 동원이었다. 전문학교 대표들은 곧바로 경성고등보통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신학교, 중앙학교, 선린상업학교 등의 학생들을 만나 독립시위를 모의했다.
▶히사시가미라 불리는 일본식 헤어스타일 때문에 기생이라고 오해받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첫날 만세시위 모습│한겨레
3월 5일 수천 명 독자 거리시위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서울 시내에서 선언서를 나눠주고 군중을 동원하는 일은 학생의 몫이 되었다. 강기덕은 2월 28일 오후 4시경 정동교회에서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에게 선언서 약 1500매를 건네받았다. 그날 밤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선언서를 나누었다. 3월 1일이 되자 각 학교에서는 학생 대표가 나서 ‘우리들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오늘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후 학생들을 탑골공원으로 이끌었다. 200여 명의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오후 2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부른 뒤 시가행진에 나섰다.
학생 독자 시위 예정일이던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독립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시위에는 거리의 시민은 물론,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고 귀향길에 오르기 위해 역으로 나온 사람들이 합세했다. 시위대 규모는 순식간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강기덕과 김원벽이 인력거 위에 올라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경찰은 남대문에 방어선을 쳤으나 역부족이었다. 시위대는 방어선을 뚫고, 한 무리는 남대문시장과 조선은행을 거쳐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다. 다른 무리는 대한문과 무교정을 거쳐 보신각을 향했다. 두 시위대는 보신각 앞에서 합류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해산해야 했다. 그날 밤 경찰은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조선총독부는 학생 시위의 확대를 우려하며 3월 10일 서울 시내 중등학교와 전문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그러자 학생들은 선언서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시위를 일으켰다. 휴교 조치가 3·1운동의 확산에 기여한 셈이다.
시위뿐 아니라 동맹휴학으로도 항거
3·1운동에서 학생들은 거리시위에만 나선 것이 아니었다. 동맹휴학, 즉 맹휴를 통한 항거도 있었다.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이 거리시위에 나섰다면,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학생들은 주로 등교를 거부하며 맹휴를 벌였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는 3월 6일에 학생 맹휴가 시작되어 3월 14일까지 이어졌다. 경찰이 학부형 회의를 소집해 주모자들을 처벌하겠다고 했으나 이에 항의해 3월 15일에도 4학년 대부분이 결석했다.
조선총독부의 판단처럼 중앙지도부가 부재함에도 3월 1일의 시위가 두 달이 넘는 전국적 항쟁으로 확산된 데는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이렇게 3·1운동에서 보여준 학생들의 정의감과 독립을 향한 열정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에도 학생운동은 4·19혁명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민주화의 도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1운동 당시 더 주목받은 것은 여학생의 등장이었다. 더욱이 여학생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검거되고 투옥되어 재판받는 모습은 더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경찰서에서 구치소로 이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조선인들 가슴속에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유관순은 3·1운동에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여학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충남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유학생이었다. 3월 1일과 5일 서울 시위에 참여한 유관순은 임시 휴교령이 내리자 독립선언서를 들고 3월 13일에 귀향해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4월 1일에 병천 아우내장터에서는 3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진 데는 학생들의 활약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조직적인 배포가 큰 역할을 했다.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만 1000매가 1919년 2월 28일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날 곧바로 개성에 독립선언서를 전한 사람은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오화영 목사였다. 그는 개성에 사는 강조원 목사에게 독립선언서 200매를 보냈다. 그날 밤 개성 남부예배당에 모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지 않고 호수돈여학교 서기인 신공량을 통해 북부예배당에 숨겼다.
▶2월 28일 낮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 3·1절 100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뒤 용산구 주민과 숙명여대학생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한겨레
여학생도 동참해 독립운동 주체로
하지만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는 이 사실을 알고 여전도사인 어윤희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아 3월 1일 개성 시내에 배포했다. 다음 날인 3월 2일 어윤희는 호수돈여학교 기도실에서 학생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모의했다. 이튿날인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은 기도회를 마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 행진에 나섰다. 어윤희가 연설을 시작하자 여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부산 최초의 만세시위도 일신여학교 학생들에 의해 일어났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0일 기숙사에 모여 태극기 100개를 제작했다. 그리고 3월 11일 밤 9시에 고등과 학생 11명이 교사인 주경애, 박시연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나와 좌천동 거리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감행했다. 여기에 군중이 가세하면서 수백 명에 이른 시위대는 2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는 부산 최초이기도 했지만, 경남 지역 만세시위의 효시이기도 했다.
이처럼 3·1운동에서는 학생, 특히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했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 즉 신여성은 3·1운동 이후에도 활발한 현실 참여로 여성운동이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자리 잡도록 이끈 주체였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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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