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수차례 열린 만민공동회 가운데 1898년 가장 큰 규모로 열렸던 관민공동회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독립신문강독회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그렇게 격변의 1894년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확연히 변하기 시작했다. 칼 대신 펜을 들어 공론을 형성하고, 자발적 결사체를 조직하고 비폭력의 평화시위를 열어 정부에 개혁을 압박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독립신문>이 포문을 열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한 순 한글 <독립신문>의 목표는 분명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들겠다!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않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것이고, 서울 백성만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해 무슨 일이든 대신 말해주려 한다.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인민들은 열광했다. 신문을 돌려 읽었고 장터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낭독했다. ‘오가는 손님이며 장사하는 사람과 시골 백성들이 어깨를 비비고 둘러서서 재미를 붙여 함께 듣고 찬탄하더니만, 그다음부터는 물건 사러 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독립신문> 낭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장시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황실의 매국 행위를 비판하며 경운궁 대안문(지금의 대한문) 앞에서 연 만민공동회로 추정되는 집회에 모인 군중 모습│한겨레
“누구나 볼 수 있고 모두를 대변”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던 격동의 시기에 <독립신문>은 서울과 지방의 정보 격차를 순식간에 해소했다. 이제 서울 소식이 며칠 만에 산골짜기 인민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신문을 읽게 되면서 사람들은 나랏일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립신문>에 열광한 이유를 영국의 여성 지리학자인 비숍은 이렇게 평가했다.
‘<독립신문>은 권력의 남용을 고발해서 이를 만천하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합리적인 교육과 이성적인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신문은 탐관오리에게 하나의 공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고, 나아가 이를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실천하는 방식을 익혀갔다. <독립신문>은 자신들이 인민의 제일가는 친구이자 대변자라고 자부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7월에 독립협회가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토론회와 집회를 열어 공론을 모으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는 자발적 결사체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설치해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독립협회는 안건이 생길 때마다 회원의 직접선거로 총대위원을 뽑아 토론하고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만민공동회 당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독립신문강독회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
왕권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협회는 ‘불온’한 존재였다. 고종은 독립협회에 정부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리의 진퇴를 논하는 권력 감시 운동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독립협회는 즉각 비판했다.
‘법을 문란하게 만드는 신하가 있으면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다. 우리 집회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서울과 시골에서 뭇 인민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어 모인 것이다.’
독립협회는 시민 불복종 운동에도 나섰다. 독립협회 회원들이 고종의 권력 감시 운동 금지 명령에 불복해 정치 집회를 열었다며 경무청에 몰려가 처벌을 요구했다. 4일간 철야 시위 끝에 고종으로부터 ‘자기의 의견 표현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라는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를 지켜본 외국 공사들은 본국 정부에 독립협회가 언론의 자유를 쟁취했다고 보고했다.
독립협회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얻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입헌군주제로의 체제 전환을 꿈꿨다. 독립협회 지도자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1898년 청에서 입헌군주제 운동이 일어날 무렵 독립협회도 의회 개설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정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고종이 좀처럼 의회 개설에 나서지 않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 앞에서 밤낮으로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요구에 굴복해 의회 설립을 약속했다.
11월 5일은 독립협회가 중추원 의원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혁명에는 반동의 공세가 따르기 마련이듯, 선거 전날 밤 서울 시내 곳곳에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세우려는 계획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종은 가짜뉴스 여부도 가리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다. 11월 5일 새벽,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에 해산을 명령했다.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표지│프로네시스
121년 전 서울 가을~겨울, ‘탄핵’ 때처럼
인민들은 곧바로 만민공동회를 열어 항의했다. 독립협회 활동의 절정기였던 1898년은 만민공동회라는 도시적 집회와 시위가 처음 열린 해이기도 했다. 첫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도로 3월에 열렸다. 여기서 인민들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자 놀랍게도 러시아가 한발 물러섰다. 첫 만민공동회의 승리 이후 인민들이 다투어 만민공동회를 열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의 운영 방식은 독립협회와 같았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임시 회장과 총대위원을 선출해 결의사항을 집행하도록 했다.
1898년 가을과 겨울, 서울 거리는 연일 이어지는 만민공동회로 북적댔다.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타도록 한 김홍륙 등 관련자들에 대해 정부가 반인권적인 고문을 자행하고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민들은 열흘이 넘게 만민공동회를 열어 규탄했고 결국 7명의 대신이 퇴진했다. 대대적인 집회와 시위가 이렇게 장기간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독립신문>은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압제해 인민 간에 싸움을 만들어내어 나라를 위태하게 하는 간신배’에 분노한 인민들이 거리에 나왔다고 진단했다.
만민공동회가 11월 5일에 당장 시작한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운동은 6일 만에 성공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익명서를 뿌린 인사들을 처벌하고 독립협회가 재허가될 때까지 시위와 집회를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보수세력은 무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자 황국협회에서 활동하는 보부상을 동원해 집회 현장을 습격했다. 하지만 분노한 인민들이 보부상들을 몰아냈고 만민공동회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인민들은 신문을 돌려 읽었고 장터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낭독했다. 독립신문 국문판과 영문판│연합
고종이 천막 찾아 만민공동회 대표 만나
그러자 고종이 인민을 달래고자 직접 나섰다. 11월 26일 고종은 경운궁 밖 천막에서 만민공동회 대표를 직접 만나 그들의 요구 조건을 모두 승낙했다. 이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인민이 몰려들었다. 고종은 칙어를 내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나라와 인민이 서로 소통하는 길을 열 것을 약속했다. 이 칙어는 한글로 번역되어 신문을 통해 전국에 퍼져갔다. 인민 누구나가 황제가 한 약속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보수파 인사를 내각에 앉히는 등 결국 인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인민들은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7만 명 정도였는데 만민공동회에는 매일 1만~2만 명이 모였다. 학생, 상인,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연일 철야 농성을 펼쳤다. 이 소식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민공동회에 지지를 표하며 성금을 보내왔다. 집 판 돈 일부를 보낸 이, 배를 보낸 과일 장수, 술을 보낸 술장수부터 감옥의 죄수는 물론 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성금이나 물품을 쾌척했다. 나무꾼들이 기부한 장작은 철야 농성장의 밤하늘을 훤히 비췄다. 만민공동회를 엄호하던 200여 명의 군인이 지지를 표명하며 자진 해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인민의 성원과 지지에 찬비와 추위를 무릅쓰고 철야 농성을 불사하던 만민공동회는 겨울의 문턱에서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에 해산되고 말았다.
만민공동회는 농촌에서 농민이 주체가 된 종전의 봉기와 달리 도시라는 공간에서 인민이 주도한 비폭력의 시위이자 집회였다. 또렷한 지도부 없이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맞대며 꾸려간 공동체였다. 또한 기나긴 철야 시위를 통해 전국적 관심을 이끌면서 연대 문화를 만들어냈다.
김정인_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친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등이 있다. 현재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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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