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의 오버액션토끼 카드
최근 카드회사들이 캐릭터 카드를 선보이고 있다. 신한카드의 ‘미니언’ 캐릭터, 국민카드의 오버액션 토끼, SC제일은행의 미키마우스, KEB 하나은행의 포켓몬 등이 그것이다. 카드 디자인은 어느 상품·서비스보다도 보수적이다. 은행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은행이나 보험처럼 굳건한 믿음을 주어야 하는 비즈니스는 대체로 질서정연한 보수적 디자인을 따르기 마련이다.
디자인은 하나의 기호 작용이다. 특정한 형태와 색의 조합은 특정한 정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자극한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와 밝고 높은 채도의 색은 긍정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각진 형태, 어둡고 탁한 색은 부정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본능적이든 아니면 후천적이든 사람들 마음속에 쌓인 경험은 특정한 대상과 디자인에 대한 특정한 기호 작용을 낳는다.
▶신한은행의 미니언 체크카드
신용으로 먹고사는 은행의 변신
1875년 설립된 대표적 금융기업인 푸르덴셜 보험회사는 지브롤터 바위를 상징물로 삼았다. 거대한 바위라는 대상과 그것을 형상화한 로고는 돈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믿음을 주도록 선택하고 디자인한 것이다. 푸르덴셜은 100년 넘게 이런 구체적인 형상의 트레이드마크를 유지했다. 너무 진부하다고 여겼는지, 1980년대에 갑작스럽게 마크를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형태로 리뉴얼했다. 그런데 리뉴얼 디자인의 단순화가 너무 지나쳐 고객들이 그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디자인에서 지브롤터 바위를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바꾼 지 5년도 되지 않아 다시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돌아갔다.
▶SC제일은행의 미키마우스 카드
푸르덴셜 보험회사의 사례에서 보듯 내 돈을 맡기는 곳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그 기업의 시각적 정체성에 크게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회사들의 로고를 보자. 이 로고들의 공통점은 1950~60년대에 유행한 국제주의 타이포그래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띤다는 점이다. 국제주의 타이포그래피는 스위스에서 시작된 디자인 스타일로 글자는 주로 산세리프체(세리프가 없는 글자로서 좀 더 기계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를 쓰고, 아주 엄격한 질서 아래 디자인된다. 이런 스타일은 세련되었지만, 지금은 조금 보수적으로 보인다.
▶미국, 독일, 프랑스, 중국, 영국, 일본 최고 금융기업들의 로고는 엄격한 모더니즘 스타일이다.
고객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또 하나의 산업군이 있다. 바로 항공여객 산업이다. 금융업이 자신의 돈을 맡기는 곳이라면 항공여객업은 목숨을 맡기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보잉사에서 100명이 넘는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대형 여객기를 생산해 항공여객 산업이 본격적으로 대중화하기 시작한 1950~6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비행기 타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따라서 항공사들은 고객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시각적 정체성을 찾는 데 골몰했다.
▶영국의 대표 저가항공사인 이지젯(EasyJet)의 대담한 동체 디자인
독일의 루프트한자를 비롯해 프랑스의 에어프랑스, 미국의 아메리칸 에어라인 등 주요 항공사들은 금융업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질서를 지향하는 국제주의 타이포그래피 스타일로 각자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그것이 항공사에 대한 믿음을 높이리라 믿은 것이다. 회화로 예를 들어보자. 몬드리안의 엄격한 구성 작품으로 자사를 표현한 기업과 잭슨 폴록의 어지러운 액션 페인팅으로 표현한 기업이 있다고 치자. 그것이 항공사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결과는 자명하다.
▶장난스러운 저가항공사 밸루젯의 로고 디자인
항공사도 엄격함에서 귀엽고 친근하게
그런데 1990년대에는 저가항공사들이 전 세계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이미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따라서 저가항공사들은 무겁고 보수적인 이미지의 기존 대형 항공사들과 차별화하고자 오히려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1995년에 설립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저가항공사가 된 영국의 이지젯(EasyJet)을 보자. 로고로 선택한 글꼴은 ‘쿠퍼 블랙(Cooper Black)’이다. 이 글꼴은 두꺼운 획을 가진 동글동글한 형태로 인해 귀여워서 어린이와 관련된 상품에 주로 쓰였다. 이지젯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가항공사가 이처럼 귀여움과 친근함을 주제로, 또 장난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자사의 시각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영국의 비엠아이베이비(bmibaby), 미국의 송(Song), 테드(Ted), 남아프리카의 망고, 인도의 스파이스젯(SpiceJet)처럼 이름에서도 부르기 편하고 친근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그 상품이 그야말로 저렴한 시장까지 이동했음을 반영한다. 1950~60년대에는 부자 국가의 부유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던 항공 여객이 20세기를 전후로 전 세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상품의 이미지는 엄격한 질서에서 벗어나 좀 더 관대해진다.
▶푸르덴셜 보험회사 초기 로고와 1980년대에 리뉴얼한 로고. 너무 급격하게 추상화해 바위의 느낌이 사라졌다. 조금 구상적인 로고로 다시 바꿔 현재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신용카드 시장에 등장한 캐릭터 카드도 이 같은 현상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전에는 돈을 가진 사람들만 카드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 시절의 카드는 사용자에게 자긍심을 부여했다. 자긍심을 주려면 카드는 좀 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스타일로 디자인돼야 한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카드를 현금처럼 이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중학생만 돼도 체크카드 정도는 들고 다니는 시대다. 그러니 카드는 다변화되고, 친근하게 다가서려는 디자인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옛날 사람이 보면 못 믿을 디자인이지만 말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