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에 스페인의 코르도바 지역을 통치했던 압드 알 라흐만 3세는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석양의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꼈던 날이 과연 몇 날이나 되었는지 헤아려보니 겨우 14일이었다. 그러니 세상사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마라.”
라흐만 3세가 재위에 있을 당시 코르도바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50년간 최전성기의 군주로서 영광을 족히 누렸을 그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정산한 행복의 총량은 고작 14일. 그렇다면 과중한 세금과 부당한 노역에 시달렸을 일반 농민들과 노예들의 행복 일수는 몇 날로 환산할 수 있을까. 물론 신분의 귀천이 행복의 크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는 않겠지만.
행복감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 감정이다. 행복을 규정하는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지상의 삶에서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 또한 저마다 다를 테다. 그럼에도 명예, 부요, 사랑 셋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용케도 그 선택의 정점에 도달했다면?
명예를 택해 만인의 존경을 얻었으되 급기야 허명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의 진실한 청중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재산을 거머쥔 부자라면 타인의 존경심을 얻기 위해 진실이 의심스러운 자서전을 꾸며대거나,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정치판을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의 환심조차 카드로 결제하려 들 수도 있다. 반면 사랑을 우선순위로 꼽은 사람일지라도 사랑만으로 안전한 일상을 꾸려갈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만 사랑의 실패에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사랑을 꿈꿀 확률이 높다.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말에 기대어.
명성은 때로 공허하고, 재물은 때로 삭막하며, 사랑은 대부분 위태롭다. 우리는 그 어떤 선택도 행복의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셋 중 하나를 충족함으로써 나머지 둘의 결핍을 상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오던 여고동창은 매번 가난한 작가 친구의 안부는 묻는 둥 마는 둥이었다. 저에게 새로 생긴 자랑거리를 실컷 늘어놓은 다음에 어김없이 붙이는 후렴구는 한결같았다. “그래도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까 행복하겠다.”
이게 무슨 말? 그럼 이때까지 한 자랑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하소연이었나. 결국은 나도 발끈했다. “너도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잖아. 집값이 뛰었고, 심심풀이로 연 가게의 매출이 쏠쏠하고, 집에선 입 험한 남편이 밖에선 총장 감으로 거론되고, 저밖에 모른다던 딸년은 내로라하는 중견기업의 며느리로 들어갔고. 끊어. 앞으론 전화하지 마.”
누구나 무언가를 손에 넣게 되면, 이미 손에 넣은 것의 가치보다 미처 손에 넣지 못한 것의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세속 세계를 주의깊게 써낸 영국 작가 존 버거는 말했다. “인간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세지 않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센다. 모든 있음이 상실로 변해버린 것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행복을 향한다. 그러나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과 행복에 대한 강박은 행복의 암초가 될 뿐이다. 행복 일수의 증감은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꼈던 날은 과연 몇 날이나 될까.
정길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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