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그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중 하나로 ‘픽토그램(pictogram)’이라는 사인 시스템이 있다. 정말 잘된 디자인은 무대 위의 화려한 스타 의상이나 독특한 모양의 거대 건축물처럼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익명으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와 비슷하다. 그것은 기능을 잘할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기능을 제대로 못할 때는 그 즉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각종 사인 시스템도 그런 것이다. 그중에서도 픽토그램의 역할은 늘 과소평가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비상구, 장애인, 화장실 픽토그램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픽토그램은 사람의 상식, 즉 보통 사람들 누구나 알 만한 지식을 바탕으로 디자인된다.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처음으로 적용된 종목별 픽토그램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축구는 공을 차고 드리블하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사이클은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표현되는 식이다. 공, 자전거, 유도복, 역기 같은 누구나가 그 종목을 자명하게 알 수 있는 소품을 이용해 종목별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서 전 세계 관객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특별한 소품이 없는 수영의 경우는 선수가 풀로 뛰어들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표현해서 수영 경기장의 출발선으로 인식하도록 해놓았다. 1972년 뮌헨올림픽 픽토그램은 화장실 픽토그램을 비롯해 우리에게 알려진 수많은 픽토그램의 모범이 되었다.
▶ 1972년 뮌헨올림픽에 처음으로 적용된 올림픽 종목별 픽토그램. 독일의 그래픽디자이너 오틀 아이허가 디자인했다. ⓒ김신
픽토그램은 또한 보편성을 토대로 디자인된다. 오늘날 픽토그램은 국제표준화기구(ISO, International Standard Organization)가 표준을 정해 전 세계에 똑같이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전 세계인이 누구나 인정해야 하므로 문화적 특수성은 배제된다. 예를 들어 식당의 픽토그램은 포크와 나이프로 표현된다. 극동아시아 식으로 표현하면 식당의 가장 적절한 그림 기호는 젓가락이 되겠지만, 그것은 특수한 문화로 여겨지므로(이는 서구식 양식이 곧 보편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채택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과 같은 20세기 이후에 탄생한 기계문명은 지역성을 초월한다. 버스나 지하철, 택시, 비행기의 시각적 형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동일하다. 따라서 이들을 표현한 그림 기호는 문화적 특수성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젓가락이냐 포크냐와 달리 버스와 택시처럼 전 세계에 두루 통용되는 공통의 문화라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표현에서 보편성의 성취라는 문제는 미세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ISO는 특정한 개념을 표현하는 픽토그램을 정할 때 여러 후보 안을 받아 선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가운데 ‘맹견주의’ 픽토그램의 결정 과정을 보면 그것이 세계인의 보편적 인식을 바탕으로 결정된다는 걸 잘 보여준다. 자, 네 가지 후보 안이 있다. 이 중에서 맹견주의에 가장 적절한 그림 기호는 무엇일까? 첫 번째 개는 맹견처럼 보이지만 혓바닥을 내밀고 있어서 왠지 적대적이라기보다 우호적인 인상이다. 두 번째 개는 혼자 앞모습이다. 맹견은 앞모습보다는 옆모습, 즉 프로필(profile)에서 그 사나움이 극대화된다. 앞으로 튀어나온 주둥이가 사나운 인상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가 처져서 입 꼬리가 처진 화난 모습임에도 오히려 보는 사람에 따라 귀엽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세 번째 개도 첫 번째 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네 번째 개는 첫 번째 개와 세 번째 개와 비슷하지만 주둥이의 각도가 처지지 않고 높아서 좀 더 공격적이고 적대적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네 번째 개의 목줄은 징이 박힌, 이른바 하드코어(hardcore)적 목줄이어서 이 개는 진짜 사나운 싸움 개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 21세기에 결정된 ‘맹견주의’ 픽토그램. 한국의 박진숙 교수팀이 디자인했다. ⓒ김신
결국 네 번째 안이 맹견주의 픽토그램으로 결정되었다. 이 네 가지 안을 보여주고 투표를 하면 절반 이상이 네 번째 안을 뽑는다. 이것이 보편성이다. 하지만 네 번째 안에 투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두 번째 안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징이 박힌 목줄을 하고 있는 네 번째 개처럼 생긴 개가 실제로 반드시 다 사납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무서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는 겁이 많을 수도 있고, 반대로 착하게 생긴 사람이 사이코패스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픽토그램의 세계는 보편성, 즉 ‘개별적 실제(reality)’가 아닌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perception)’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픽토그램은 그림 기호로서 재빨리 그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다. 건물에서 불이 났을 때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때 비상구 사인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살아날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픽토그램은 더더욱 사람의 보편적 인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보편성은 다양성과 개별성을 희생시키며 압축적인 표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