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2018년 12월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제4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자료를 찾고있다. | 한겨레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2월 1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한항공과 지주회사인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 행사의 범위를 결정하면서 그 근거가 된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승객의 안전과 편익을 최우선하는 스튜어드(승무원)처럼 기관투자자들이 고객이 맡긴 돈을 최선을 다해 관리하도록 만든 지침이다. 국민연금이나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들이 투자한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해 기업의 가치와 투자자의 수익을 함께 높이려는 목적으로 제정됐다. 2008년 금융위기가 경영진의 잘못을 기관들이 제대로 견제하지 못해 일어났다는 자성이 일면서 영국이 2010년 처음 도입했다. 현재 네덜란드, 캐나다, 스위스, 일본, 대만, 미국, 호주 등 20개 국가가 시행 중이다. 우리나라도 2016년 12월 19일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를 공표했다.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주주이익 증대 등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경우 기관투자자와 기업 사이에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고 기업지배구조가 개선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사회와 대화 등 비공식 주주 활동은 투자수익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공개서한-주주권 행사, 단계적 압박
우리나라 국민연금도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적극적 주주 활동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유는 주주가치와 기금의 장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맡은 수탁자로서 연금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보다 많은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되려면 국민연금이 거수기에서 ‘행동하는 주주’로 탈바꿈해, 주주가치를 훼손한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이끌어내야 한다.
최근 공개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른 세부 지침(수탁자 책임 활동 가이드라인)을 보면, 국민연금은 크게 두 갈래로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우선 경영진 일가의 사익편취 행위, 횡령·배임, 부당지원행위 등 중점관리 안건에 2회 이상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는데도 개선하지 않을 경우 공개서한 발송에서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까지 단계적으로 압박 수위를 높여나간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내부 경영 사안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기업에 대해 주주권을 행사한다. 사주 갑질,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으로 기업가치를 떨어뜨린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또 환경, 사회 책임, 지배구조 등 사회책임투자(ESG) 분야에서 기업가치 훼손 우려가 발생하면 경영참여형 주주권 행사 등 단계별 수탁자 책임 활동을 벌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 23일 공정경제 추진전략 회의에서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9월 말 기준으로 약 124조 원의 자금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회사만 300곳에 가깝다. 전체 상장사의 7곳 중 1곳꼴(14%)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모두 726회의 주총에 참석해 2782건의 안건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 중 반대 의견은 535건으로 전체 주총 안건의 19.23%를 차지했다. 2017년(12.87%)보다 6.36%포인트 높아졌다. 시장의 반응도 우호적이다. 신한금융투자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맞물려 지주회사들의 배당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세계의 연기금들은 공공성을 갖는 기관투자자로서 환경문제 해결이나 사회 인프라 투자,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공익 목적의 사회적 책임투자 원칙을 지향하고 있다.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해외 주요 연기금은 기업 이사회와 미팅, 투자배제 리스트 작성·공개, 이사 후보 추천 등 다양한 형태의 주주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수이 캐나다 국민연금투자위원회(CPPIB) 아시아태평양대표가 1월 24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세계경제연구원이 연조찬 강연을 하고 있다. | 세계경제연구원
“싸우는 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미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 캘퍼스(CalPERS)는 1987년부터 지배구조와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중점 관리해야 하는 기업들의 명단(포커스 리스트)을 발표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사회의 질적 수준과 다양성, 투자자 권리, 사회·환경 이슈에 관한 위험 등을 고려해 선정한다. 최고경영자 교체와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요구받은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개선되면서 주가 상승률이 시장 평균을 크게 웃돌아 ‘캘퍼스 효과’란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캘퍼스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2014년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컨과 애플 주식을 둘러싸고 벌인 공방이 대표적이다. 칼 아이컨은 애플에 자기주식 매입을 요구했으나, 캘퍼스는 적극적인 반대로 이를 무산시켰다.
미국 최대 사학연금(TIAA-CREF)과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도 포커스 리스트 작성, 주주 소송, 입법 운동 등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네덜란드 공무원연금은 기업의 인사·노무 관리에도 개입한다. 소매·유통업계 노동자들의 재직 기간이 길어지면 생산성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 관련 기업들에 고용 인력의 이직 비율과 직무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공시를 요구했다. 정유·화학 기업에서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안전보장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일찍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캐나다 국민연금은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를 중요한 투자 잣대로 삼는다. 김수이 캐나다 국민연금투자위원회(CPPIB)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1월 23~24일 국내 간담회와 강연 등에서 “효과적인 지배구조 모델은 기업의 장기 가치 창출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주주를 비롯해 회사 이사회와 경영진의 공동 책임”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연금이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기 위해 수익률을 높이려면 능동적인 주주권 행사와 함께 이사회의 다양화, 투자 포트폴리오의 다각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기금이 기업과)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라면서 “한국에서도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는 등 이러한 조짐이 보이는 것 같아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한광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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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