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이나 제사상 예법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지금도 ‘남의 제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많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 것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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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백서(紅東白西)와 조율이시(棗栗梨?)는 오랫동안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파격과 모험이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씨는 추석 때마다 “차례상에 바나나를 올려도 되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왜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차례상은 집안 형편과 사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제사에 올라가는 음식도 시대에 따라 이미 변화하고 있습니다. 필수로 여겨지는 사과도 품종 개량을 통해 한가위에 올릴 수 있는 것이지, 재래종인 능금이었다면 차례상에 올릴 수 없는 제물이지요. 한가위는 오곡백과가 나올 때가 아닙니다. 실제로 차례상에 올릴 것이 없어요.”
1970년대 이후 대중매체에서는 추석 차례에 대한 방송을 하고 신문 지면에 올바른 예법에 대한 일러스트까지 그려 넣어가며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것은 소비와 과시의 시대를 맞은 새로운 현상일 뿐 우리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와서 전통을 살리자고 하는데, 옛것을 고수하는 것이 전통일까요? 진짜 전통은 시대에 맞춰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씨는 최근 우리 음식의 역사에 관한 <식사(食史)-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를 발표했다. 제목 그대로 고전에서 한식에 관한 내용을 발췌해서 꼼꼼히 정리한 책이다. <조선왕조실록>부터 <음식디미방>, <규합총서>, <수운잡방> 등 음식과 관련된 문헌을 두루 살폈다. 그가 “마음대로 차려도 된다”는 말은 모든 고증을 살펴본 뒤에 하는 말이다. 황광해 씨는 손꼽히는 유학 명문가인 파평 윤씨 집안을 예로 들었다.
“조선 후기 문인인 명재 윤증은 후손들에게 ‘제상에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과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마라’, ‘훗날 못사는 후손이 나오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테니 간단히 하라’고 당부했어요. 과거에는 기름이 많이 들어가는 유과나 전이 사치스러운 음식이었거든요.”
실제로 파평 윤씨 종손이 차리는 차례상은 밥과 탕, 어포와 육포, 제철 과일로 단출하다. 이런 모양을 갖추게 된 데는 조상의 당부가 크게 작용했다. 황광해 씨는 한반도에서 반상의 차별이 없어지면서 역설적으로 묘지와 제사가 화려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한국인 전체가 ‘신분 세탁’이 되었고, 도시와 농촌이 섞이면서 신분을 따지지 않게 되었는데, 이것이 도리어 복잡한 제사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름난 가문은 자신 있게 없애는 데 양반인 척하는 사람들, 중간에 어정쩡하게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격식을 따지고 제사를 복잡하게 만들어요. 문헌을 살펴봐도 꼭 지켜야 할 규칙은 없습니다. 그냥 내가 평소에 먹는 것보다 조금 더 정성을 기울이고, 제철 음식 몇 가지만 올리면 그만이죠.”
유교에서 음식은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주요 도구이다. 가장 좋고 정성스런 음식을 손님맞이와 제사에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제사의 모든 음식을 남자들이 만들었다. 지금도 제사상 위에 올라가는 몇몇 음식은 남자인 종손이 직접 정성들여 만든다.
남자가 제사 음식을 차리는 것이 정통 유교의 정신
“진짜 유교 정신을 따르려면 남자들이 제사 음식을 차려야 합니다. 영조 42년, 영의정 홍봉한이 영조와의 독대 자리에서 꺼낸 이야기가 ‘여인이 음식을 만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교에서 여자는 정결하지 못한 존재로 여겼으니까요. 또 가문의 제사를 다른 집안 사람이 지내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죠.”
제사 음식과 궁중의 일상적인 음식을 만드는 일은 유교의 법도에 따라 중요한 일이었다. 민간 반가나 상민의 집에서는 여자들이 음식을 만들기도 했지만, 궁중이나 관청의 음식은 철저히 남자들의 몫이었다. 음식 만드는 일부터 식재료 장만, 물 떠오는 일까지 모두 남자의 몫이었다. 음식은 숙수(熟手), 선부(膳夫), 재부(宰夫), 옹인(饔人), 수공(水工), 반공(飯工) 등이 만졌다. ‘부(夫)’는 사내, 남정네다. 선부는 반찬, 재부는 고기, 옹인과 반공은 밥 짓는 일을 맡았다. 한양과 지방의 관청도 마찬가지였다. 음식 만드는 일에 여자가 끼어드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영의정 홍봉한 역시 “고귀한 일에 내력이 불분명하고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여러 숙수들과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영조 42년은 조선 후기로 기강이 얼마간 허술해지면서 여자들이 음식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옛말 중 ‘장꼬마마’라는 표현이 있는데, 장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여자가 음식을 만들지 않았느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절의 이야기다. 고종, 순종 무렵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과장한 것이다. 이때 나라는 완전히 무너졌고, 한식의 바탕이 된 유교적 가치관도 무너졌을 때의 이야기다. 유교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기강이 무너진 시절의 예법을 고집하는 것은 모순이다. 차례와 제사 음식에 대해서 융통성을 가지고 유연하게 이야기하던 황광해 씨가 단호하게 이야기한 것은 마지막 한 가지였다.
“정통 유교식을 고집한다면, 남자들이 제사 음식을 차리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지켜야 할 법도는 그것뿐입니다.”
강보라 |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