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의하는 어느 학교의 교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짜증이 확 밀려왔다. 짜증은 바로 ‘버튼’ 때문이다. 최첨단 디지털 도어락의 이 버튼은 사실 매끄러운 표면 속으로 기어들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에게 버튼이란 무엇인가? 표면 위로 튀어나와 있어야 한다. 마치 대지 위에 솟아오른 건물처럼 도드라지게 위로 솟아 있어야 비로소 버튼이랄 수 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요즘 젊은 사람들, 아니 젊은이들을 떠나 매끄러운 표면에 길들여진 21세기의 세련된 취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촌스럽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아무튼 내가 누르고자 한 그 세련된 최첨단 디지털 도어락의 버튼은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평면 위에 세련된 글꼴로 그려진 숫자가 전부다. 좋다, 나도 ‘디자인 칼럼니스트’라고 명함을 파고 다니는 디자인 전문가로서 그 디자인의 세련됨에 대해서 더 이상 비판을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숫자를 눌렀을 때, 그 숫자는, 다시 말해 숫자로 모양을 바꾼 그 버튼은 자신이 눌려졌다는 반응을 사용자에게 표시해야 한다. 우리 집 전기 밥통인 쿠쿠도 이 도어락과 똑같은 형식의 디자인이다. 평면 위에 ‘취사’니 ‘보온’이니 하는 글자만 있는 버튼이지만, 이 버튼은 누르면 “맛있는 잡곡밥을 시작합니다”라고 말로써 시각적 표시를 대신한다. 이것은 당신의 명령을 접수했다는 일종의 ‘기계적 피드백’이다. 그것은 말 없는 기계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피드백이 확실한 것이 인간적인 디자인이고 겉모양의 세련미를 앞서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기계다움일 것이다. 인간이란 서로 기대서 상호작용하는 존재인데, 기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요구를 한다.
▶ 1 버튼이 도드라진 구식 도어락
2 매끈한 평면 위에 버튼이 숫자로 표현된 디지털도어락
그런데 그 피드백이 없는 거다. 고장이 난 건지, 아니면 원래 세련된 21세기형 디자인이어서 그런 건지 ‘당신의 간절한 누름을 내가 접수했으니 이제 안심하십시오’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 거다. 이것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일장 연설을 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무심한 얼굴을 본 것과 같다고 할까? 속으로는 꼰대라고 욕을 하든 말든 일단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든지, 최소한 아빠 이야기를 듣긴 했다는 뭔 반응이 있어야 그다음 단계로 자제를 하든 더 강하게 밀고 나가든 마음을 먹을 게 아닌가! 그러니까 숫자를 눌렀을 때 그 숫자는 독립적으로 빛이 나면서 ‘나 눌려졌음’이라고 표시를 해야 나는 안심하고 다음 숫자를 누를 수 있는 거다. 근데 숫자로 환원된 그 빌어먹을 버튼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다.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 3 쿠쿠 밥솥의 표면은 도드라진 버튼이 사라지고 평면 위에 쓰인글자로 대체되었다. 4 최초의 워크맨에는 투박한 버튼이 있었다. 5 워크맨 디자인이 진화하면서 커다랗게 위로 솟아 있던 버튼이 사라지고 아주 작은 소프트 버튼으로 대체되었다. 6 아이폰X는 완전히 매끄러운 평면이 되었다. ⓒ김신
내가 어떤 대학에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강의 자료를 업로드할 때였다. 용량이 큰 데이터는 업로드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러면 그 사이트는 시간이 걸리는 동안 ‘당신이 올린 데이터가 지금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고 업로드되는 과정을 별도의 팝업 윈도우로 표시해줘야 한다. 이것이 상대의 반응을 보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인간의 심리에 맞는다. 기계를 다루는 인간은 자신이 제대로 기계를 작동했는지 늘 걱정이다. 첨단 시대의 기계일수록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계는 작동하는 원리가 눈에 보였으나 디지털 기계일수록 원리가 시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첨단 디지털 기계일수록 사용자에게 당신이 실수하지 않았다는 피드백을 수시로 줘야 한다. 그런데 그 사이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다. 소리도 없고 시각적 표시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업로드가 안 되었나 의심하면서 다른 버튼을 누르다가 내 뜻과는 무관하게 사이트 밖으로 나와버리게 되었다. 다시 그 사이트로 들어가서 같은 짓을 반복하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 사이트는 원래부터 피드백이 없는 것으로 설계를 해놨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불편하게 사이트를 디자인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아, 주최 측이 팝업 윈도우 하나 띄우는 것을 ‘비용 초과’라고 계산했구나. 그래 사이트 구축하는 비용을 아껴서 학생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더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갸륵한 마음이구나.
그런데 도어락의 경우는 이와는 좀 다르다. 비용을 아껴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비용을 더 들여서 버튼을 없애고 뭔가 알 수 없는 첨단 설계를 한 것이다. 이것은 사물 표면의 디자인 역사를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1970년대 말 처음 소니 워크맨이 출시되었을 때 재생이나 녹음 버튼은 아주 커다란 플라스틱 버튼이었다. 이는 당시 카세트 라디오의 방식 그대로였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자 아주 작은 금속 버튼으로 대체되었다. 1980년대 후반 사람들은 일제와 국산의 차이를 그 소프트 터치 버튼의 차이로 구분했다. 1990년대 CD플레이어에서는 버튼의 위치가 기계 표면의 위치와 같게 되어 표면이 완전한 평면이 되었다. 그래도 버튼은 눌렀을 때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서 확실한 피드백을 주었다. 21세기가 되어 아이폰이 모든 전자 제품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 방향의 가장 큰 특징은 매끄러운 표면이고 어떠한 것도 도드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동그란 버튼 하나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 모델인 아이폰X에서는 이마저도 사라져 표면 전체가 완벽한 평면 디스플레이가 되었다. 왜 매끄러운 표면을 추구하는가? 그것은 좀 더 진보했다는 것, 더 뛰어난 기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도 세련되었다. 그리하여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도어락과 전기밥통, 에어컨, 게이트 뷰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모든 기계적 인터페이스가 세련된 평면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세련된 디자인은 ‘피드백의 약화’라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이는 마치 세련된 에티켓을 강조하는 귀족문화에서 오히려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닮아 있기도 하다. 나는 투박하더라도 확실하게 반응을 보이는 그 도드라진 버튼이 그립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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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