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의 클래식 채널에서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이 흘러나온다. 당연히 알래스카가 떠오른다. 정확하게는 알래스카에서 생긴 모든 일이. 더불어 알래스카로 떠나기 전과 알래스카에서 돌아온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이. 무심히 잡아당긴 넝쿨 줄기 하나에 땅속 덩이뿌리가 줄줄이 달려 나오는 것처럼,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기억의 과작용이다. 빌라 로보스나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이 미합중국 49번째 주 알래스카와 별다른 인연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0여 년 전 내 작은 부주의가 우연히 만들어낸 조합일 뿐이다.
알래스카 일주는 한때 의욕이 충만해 실행에 옮겼던 북아메리카 종단 자동차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광대한 캐나다를 거쳐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와 매킨리산이 있는 데날리국립공원을 찍고, 케나이 반도를 돌아 나와 올라갈 때와는 다른 코스로 남하하는 대장정이었다. 일간지에 기행문을 연재하기로 섭외도 마쳤다. 그러나 반환점인 앵커리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여행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행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자동차를 버리고 항공편을 이용해 거점인 시애틀로 복귀하기로 일정을 수정했다. 반 토막 난 여행을 그럴싸하게 짜깁기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지라 신문 연재도 철회했다.
앵커리지 공항에 상주하는 대리점에다 항공료에 버금가는 위약금을 물고 렌터카를 반납했다. 대합실에서 어색한 침묵을 견디며 탑승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 K가 전화를 걸어왔다. 동료 작가인 K는 당시 아들과 함께 밴쿠버에 체류 중이었다. 알래스카에서 내려올 때 만나기로 약속해둔 참이었다. K에게 돌연 육로 대신 하늘길을 택하게 된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불발로 그친 이국에서의 만남은 지금도 가끔 소환되는 술자리 에피소드로 남았다.
집에 돌아와 여행 짐을 풀면서 알맹이만 쏙 빼 챙겨 갔던 시디 음반을 원래의 앨범 재킷에 정리해 넣을 때였다. 그제야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 음반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챘다. 앵커리지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렌터카 안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이 하필이면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이라는 사실도. 플레이어에 들어 있던 시디를 깜빡 잊은 채 렌터카를 반납했던 것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소소한 손실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사물과 사건의 강한 접착력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로 빌라 로보스가 언급되거나 ‘브라질풍의 바흐’가 들려올 때마다 기억 또한 자동 재생 모드로 넘어간다. 빌라 로보스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바쳤던 경외의 선율이 알래스카의 실패담과 연결되다니, 안타까워라. 음악과 기억의 예기치 않은 담합이 어디 이뿐이랴. 슈만의 ‘유랑의 무리’, 카잘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라벨의 ‘볼레로’, 조동진의 ‘제비꽃’… 등등에 대해서도 풀어놓을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선곡은 취향이다. 음악 자체가 좋아서 즐겨 듣기도 하고, 곡조나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예 듣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사건과 결합해 기억의 형태로 변주된 선율은 특정한 순간의 나를 기록한 언어나 다름없다. 내가 즐겨 듣거나 결코 듣지 않는 음악은 결국 나의 성향인 동시에, 나에 관한 역사인 셈이다. 음악과 결합한 기억이 안내하는 과거의 시간은 때로 무참했고, 때로 아프고 쓸쓸했으며, 또 때로 빛났다. 그래서인가, 음악을 들으면 가끔은 나 자신의 평전을 읽는 것 같다. 음악은 듣는 것이되 읽는 것이기도 하다.
정길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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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