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한 가족이 모였다. 큰 상에는 남자들, 작은 상엔 여자들이 앉아 떡국을 먹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가족들이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던 중 동서의 복직 이야기에 시어머니의 한 말씀. “힘들어도 요즘 혼자 벌어서 어떻게 살아. 여자도 나가서 돈 벌어야지, 남녀평등 시대 아니냐.” 한데 이 말씀이 무색해지는 시동생의 한마디가 다음 장에 펼쳐진다. “형수님, 떡국 좀 더 있습니까?” 며느리는 떡국을 뜨러 주방에 가서 혼잣말을 한다. ‘그럼요. 남녀평등이 다 뭐예요. 여성 상위 시대지, 허허허.’
인스타툰 열풍에 불을 지핀 ‘며느라기’(@min4rin) 중 설날 편. 2017년부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연재된 며느라기는 초짜 며느리 민사린을 통해 결혼 후 시댁과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내밀한 갈등과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화제작이었다. 독자 사랑에 힘입어 책 출간과 함께 책과 굿즈를 판매하는 팝업스토어도 연 바 있다.
며느라기가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는 공감할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설날 편 댓글에도 공감의 한마디가 줄을 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화딱지 나요.” “흑흑. 우리 집도 이랬어.” “남자인 저도 욕하며 봤습니다.”
▶우야지(@ziu16)의 ‘육아툰’
위암 4기 항암 투병일기 잔잔히
사람들이 인스타툰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렇게 ‘내 얘기 같다’며 무릎을 치는 대목이 많다는 데 있다. 웹툰 작가로 활동하며 ‘쌩초보 웹툰 작가 도전하기’ 등 일반인 대상 웹툰 교육을 하는 현창호 작가는 “인스타툰에서 일상툰 장르로 등장하는 만화 캐릭터들은 독자들에게 인스타그램 속 어떤 지인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어준다”며 “유명 연예인 인스타그램이 선망의 대상이라면, 인스타툰의 만화 캐릭터는 공감의 대상”이라고 했다. 공감의 대상이 등장해 몇 장 안 되는 컷에 촌철살인 글·그림으로 내 마음속 이야기를 해준다는 점. 긴 서사로 이루어진 웹툰과는 다른 인스타툰만의 매력이다.
‘공감’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육아툰이다. 인스타툰 중 ‘썬비의 그림일기’(@sundayb)는 육아툰의 대표작이다. 썬비의 생활 밀착형 육아 그림일기를 담으며 ‘육퇴’(육아 퇴근) 못한 이들에게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위로를 전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결혼 5년 만에 딸 ‘소망이’를 낳은 ‘우야지’(@ziu16) 작가는 ‘난임 극복툰’으로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소망이를 키우며 겪는 일들을 담은 육아툰을 연재 중이다. 자연임신, 인공수정 등에 실패하고 세 번째 시험관 수술에 성공해 소망이를 낳은 작가는 “일반적인 육아 이야기는 많은데 난임 이야기는 없었다”며 “나도 힘들게 아이를 갖게 된 과정을 회상하고 싶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 그의 인스타툰은 난임으로 힘들어하는 부부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지금 딱 저를 보는 듯한 ㅠㅠ” “정말 겪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저도 지금은 딸이 있지만 그땐 참 많이 울었어요” 등 공감의 댓글이 넘쳐난다.
최근 독자뿐 아니라 작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인스타툰도 있다. 그림책 작가 윤지회 씨의 ‘사기병’(@sagibyung)이다. 윤 씨는 위암 4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투병 일기를 인스타툰으로 올리고 있다. 현창호 작가는 “환자이기 전에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인 그가 고민하고 변화해나가는 모습에 절로 응원하게 된다”고 했다.
▶유니유니(@yoonee3326)의 ‘취준생의 일상’
인스타툰에서 20대 청년들 이야기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유니유니’(@yoonee3326)는 취준생의 일상을 다룬 인스타툰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면접에선 자꾸 떨어지고, 명절에 친척들을 찾아가면 불편한 질문만 받고, 너무 여러 곳에 원서를 넣다 보니 내용을 ‘복붙’(복사해서 붙이기)하다 기업 이름을 잘못 쓰는 실수를 저지르는 등 취준생이면 누구나 공감할 사연을 몇 장의 그림에 담았다. 특히 작가가 직접 겪은 취업 준비 후기와 일상 이야기라 더욱 실감이 난다. 작가는 “한 모바일 메신저 회사에 입사 지원을 하며 포트폴리오에 ‘유니’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 회사는 떨어졌다. 이후 캐릭터를 버리기 아까워 인스타그램에 만화를 그려 올리기 시작한 게 유니유니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보통 SNS는 각자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공유하고 보여주는 창구인데 내가 그리는 취준생의 일상은 솔직하고 지질한, 어쩌면 누구에게 말하기 창피할 수도 있는 모습이라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저도 취업 준비를 시작하기 전엔 몰랐는데 진짜 생각보다 더 취업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각자 원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지 않을까요.” 작가가 자기 자신은 물론 독자에게 하고픈 말이다.
▶누구나(@nicetoneet)의 ‘니트일기’
직장 꼰대 대처 방법 생생히
‘남들은 회사 생활 잘하는데 왜 나만 힘들어할까?’ ‘퇴사했으니 바로 다른 직장 알아봐야 한다고들 하는데 꼭 그래야 하는 걸까….’
2030세대 중 말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이런 고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퇴사 후 니트족(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으로 살기로 한 실제 작가의 이야기를 그린 인스타툰 ‘니트일기’(@nicetoneet)는 취업 준비, 직장 생활 스트레스 등으로 지친 청춘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작가는 과거 자신의 취업 준비 생활과 직장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으로 니트족이 된 과정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저도 퇴사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시간은 흘러가고, 주변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내 시간만 멈춰 있는 것 같았어요.” 공감의 댓글도 많이 달린다.
작가는 “나도 ‘그 나이면 취직해야지’ ‘퇴사했으니 바로 입사 준비해야지’ 등 어떻게든 사회에 나가야 한다는 식의 압박으로 상처를 받았는데 독자들 반응을 보며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하며 나 역시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사회 초년생 중에 상사 눈치 보면서 안 해도 될 야근을 하거나, 회식에 참석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안 한다’고 하면 왠지 소리 들을 것 같으니까요. 실제로 기성세대들이 ‘요즘 젊은 애들은 왜 그래?’ ‘나 때는 안 그랬어’라고 말하는 걸 많이 봤어요. 그런 말들 앞에서 청년들은 ‘내가 이상한 건가’ 자책하며 원인을 본인한테서만 찾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성세대가 청년들 입장이나 고민이 뭔지 생각해보고, 물어봐줄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그가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직장인들 사이에선 직장 갑질 등 다양한 직장 생활 에피소드를 그린 삼우실(@3woosil)도 인기다. 회사에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은 ‘꼰대’들의 갑질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웹툰이다.
▶키크니(@keykney)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초등생부터 50대까지 독자 다양
인스타툰 작가들은 ‘실시간 댓글 반응’을 보며 독자와 바로 호흡한다는 점을 인스타툰의 큰 매력으로 손꼽는다. ‘키크니’(@keykney) 작가는 이런 인스타툰의 장점을 살려 독자 참여형 인스타툰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다음 생에 엄마가 제 딸로 태어나는 거 그려주세요. 다음 생에도 엄마랑 함께하고 싶어요.” “무미건조한 일상에 심장이 두근거릴 만한 일 좀 그려주세요.” “월요일 아침에 회사 가기 싫은 상황 그려주세요.” 이렇게 제안하면 그려주는 식이다. 키크니 작가만의 촌철살인 한 컷을 보고 ‘짱짱’ ‘꿀잼’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다.
일러스트레이터로 10년을 일해온 작가는 “주로 출판사와 소통할 일만 있었는데 인스타툰을 알면서 댓글로 독자와 직접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됐다”고 했다. 그 댓글들이 자신에게도 힐링이 됐는데 댓글을 통해 뭔가 해볼까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무엇이든~’ 시리즈다. 작가가 더 놀란 건 독자가 초등학생부터 40, 50대까지 다양하다는 점. 키크니 작가는 “일상에 지쳐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며 “그럴 때 무겁고 장황한 만화보단 가볍게 툭 던지는 한 장 그림과 글에 위로받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 같다. 독자들이 좋아해주시니 나도 기쁘다”고 했다.
▶곽윤섭 기자
인스타툰으로 사랑받은 콘텐츠가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며느라기’ ‘키크니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은 같은 제목의 책으로, 우야지 작가의 난임 극복툰은 <우리 집에 아이가 산다>로 출간됐다. ‘니트일기’의 작가는 독립 출판을 통해 <노력하면 못하는 게 어디 있어>를 출간한 바 있으며 출판사 제안으로 후속작도 준비 중이다. 취준생 일기를 담은 ‘유니유니’ 작가의 인스타툰 역시 5월경 책으로 독자를 만날 예정이다.
일상 인스타툰에서 책의 저자로 거듭난 작가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잘 그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하루하루를 글·그림으로 기록해보세요. 그것 자체가 일상에 활력이 됩니다. 댓글까지 달리면 더없이 기분 좋아요.”
김청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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