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이제야 봤다. 읽지 않고 봤다고 한 이유는 책이 아니라 일본 TV아사히에서 만든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내 머릿속에서 <빙점>은 ‘오싱’과 더불어 신파조 통속소설의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 어릴 적에 언뜻 본 한국판 ‘빙점’이 불륜을 소재로 한 치정극이라는 인상을 뇌리에 강하게 남긴 탓이다. 나중에 미우라 아야코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그녀의 대표작 <빙점>이 기독교문학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작품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 모순된 조합(불륜 소재 기독교문학?)은 작품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작품에 대한 인상을 어수선하게 만들 뿐이었다.
실제로 보니, 불륜이 중심 소재인 게 맞긴 맞았다. 존경받는 의사이자 병원장인 게이조는 미모의 아내 나쓰에와 함께 세 살배기 딸 루리코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는 안과 의사 무라이가 아내에게 연정을 품고 접근하면서 이야기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간다. 하필이면 무라이와 나쓰에가 밀회를 나누는 사이에, 딸 루리코가 납치당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 게이조의 심장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아내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루리코를 죽인 살인범에게 어린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아내에게 그 아이를 입양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살인범의 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채.
제 딸을 죽인 살인범의 딸이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 제 딸을 죽인 살인범의 딸인 줄도 모르는 채 온갖 정성을 다해 보살피는 어머니, 자신의 끔찍한 출신 성분도 알지 못한 채 타인을 원망할 줄 모르는 반듯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로 성장하는 요코. 하지만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는 스토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요코가 명문가의 자제에게 프로포즈를 받을 찰나, 제 딸을 죽인 살인범의 딸이 이런 행복을 누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나쓰에(이때는 남편의 일기를 훔쳐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가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고, 이에 게이조가 감춰진 진짜 내막(살인범의 딸을 입양하려다가 포기했고, 요코는 한 유부녀가 불륜으로 은밀히 낳은 아이다)을 고백하는 것이다(반전에 반전!).
사실 출생의 비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라인, 엿듣기와 일기장 훔쳐보기로 너무도 쉽게 드러나는 추문…. 이런 요소들은 우리나라 막장드라마를 빼닮은 것이기에 가벼운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말미에 이르러 증오, 질투, 배신, 복수 같은 진흙탕 같은 내면의 여정이 모두 용서와 구원이라는 주제의식을 목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이 통속성은 필연성이 되며 일종의 알리바이를 획득한다.
가령, 자신이 살인범의 딸인 줄로 오해해 죄책감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던 요코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까워서야 자기를 버린 생모를 용서한다. 용서의 계기는 간단하다. 자신이 살인범의 딸인 줄 오해했을 때 양부모에게 가졌던 사무치는 미안함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용서받고 싶었던 그 마음을 기억해낸 것이다. 흠잡을 데 없는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 게이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사랑을 보내는 여직원에게 겉으로는 냉랭했지만 속으로는 애틋하게 여겼음을 깨닫고서야 아내를 진정으로 용서한다.
왜 신이 만든 완벽한 세계에서 인간은 죄에 물들어 살아가는가. 인간에게 빛과 사랑만 주실 일이지, 어둠과 증오까지 주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는 문학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가 보다. 그렇다면 미우라 아야코가 찾은 답은 무엇일까. ‘죄인만이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 이 신비로운 아이러니! 이것이 신의 아들 예수님이 죄 많은 인간의 몸을 하고 이 땅에 오신 이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그것도 하고 많은 날들 중에 가장 어둡고 춥다는 동지 무렵에 말이다.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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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