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고, 파리대학을 졸업했다. 레비스트로스의 특별한 이력 중 하나는 28세 때인 1935년부터 4년간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브라질은 매우 낯선 곳이었다. 브라질의 대학교에서 강의하려는 교수가 없어서 봉급을 세 배나 주어야 교수를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봉급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브라질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인류학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본래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5년간 철학을 공부했지만 얻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철학은 주로 언어 문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철학에서 다루는 형식과 내용 같은 개념들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법학을 공부했지만 법학에서도 학문적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레비스트로스는 지적 방황을 계속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학설을 공부했고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지적인 만족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러한 지적 갈등과 방황을 하던 중, 레비스트로스는 우연히 미국의 인류학자 로버트 로위가 쓴 <원시사회>를 읽게 되면서 인류학에 관심을 가졌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이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에 만족했다. 인류학으로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고, 자신과 세계가 공유한 동기를 해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에 만족한 또 다른 이유는 연구 방법에서 철학이나 법학과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법학은 연구실에 앉아 사실과 개념을 검토한다. 그러나 인류학은 연구자가 직접 참여해야 한다. 원주민 사회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관찰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연구 방법이 자신의 성격과 생활을 조화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 경력이 특별한 이유는 인류학적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아마존강 유역을 답사하고 원주민 부락을 방문했다.
그런데 인류학자가 하는 일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것과 같은 모험이나 탐험이 아니다. 원주민 사회를 탐구하려면 원시림 한가운데에서 예상치 못한 굶주림, 피로, 질병을 견뎌내야 했다. 한마디로 그 일은 인내의 작업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내의 작업을 하며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나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네 개의 원주민 부족을 만났다. 그 원주민들과 만남을 담은 글이 대표작인 <슬픈 열대>이다. 그런데 <슬픈 열대>의 집필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또한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결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브라질을 떠나온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내내 이 책을 써볼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부끄러움과 혐오감이 앞서서 그만두곤 했다.”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혐오했기에 여러 차례 집필을 중단했던 것일까?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들을 만나면서 슬픈 현실을 목격했다. 원주민 사회가 해체되고 있었다. 저작의 제목을 <슬픈 열대>라고 한 이유도 원주민들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부끄러워하고 혐오한 것은 원주민들의 슬픈 현실이 아니었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혐오한 것은 유럽 문명이었다.
그런 원주민 사회의 변질과 해체는 원주민들에 의해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럽 문명이 원주민 사회를 파괴함으로써 변질과 해체가 일어난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유럽 문명의 침략성에 분노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강 유역에서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자연 상태’를 찾고자 했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 상태가 사라지고 사회가 형성되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설정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에 대한 비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소는 결코 사회를 떠난 인간을 상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악(惡)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밝히려 했을 뿐이다. 즉, 루소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악이 고유한 것인지 아닌지를 해결하고자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생각에서 자연 상태를 찾고자 했다. 그는 운이 좋아서 자연 상태와 가장 유사한 상태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환원되어 있는 사회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바로 남비콰라족의 사회가 내가 그 사회에서 오직 인간만을 발견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단순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발견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남비콰라족이 거의 종말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1915년에 나온 한 보고서에 따르면 남비콰라족은 2만 명이 넘었다. 그런데 불과 20여 년이 지나 레비스트로스가 방문했을 당시 인구는 고작 2000명 남짓이었다. 이런 급격한 해체와 몰락이 유럽 문명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 부끄러움과 역겨움 그리고 분노를 느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야만적이라 간주하고 문명을 가르친다고 했다. 원주민의 생활 방식을 부정하고 유럽인의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원주민들은 정체성을 상실했고, 유럽인이 퍼뜨린 질병에 시달렸다. 남비콰라족의 한 분파는 1900년 초에 1000명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각종 질병으로 숨져 겨우 30여 년 만에 19명의 남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을 야만적이라 여기는 유럽 우월적 인식을 비판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두 개의 사회를 보았다고 하자. 한 사회에서는 범죄자의 무서운 힘을 없애기 위해 잡아먹는다. 다른 사회에서는 범죄자를 오랫동안 사회에서 격리한다. 외계인은 어떤 사회를 더 야만적이라고 판단할까?
유럽인들은 범죄자를 잡아먹는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자유롭게 살아야 할 사람을 오랫동안 가두는 것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동료 인간들을 잡아먹는 대신에 그들을 신체적, 도덕적으로 절단시킨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위대한 정신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믿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문화 상대주의’였다. 어떤 사회에도 그 사회가 세운 규범이 있고, 그 규범과 양립할 수 없는 행동이 존재한다. 따라서 한 사회의 기준으로 다른 사회를 재단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고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의 삶이 파괴되는 현실과 아울러 그런 현실을 낳은 차별적 세계관을 슬퍼했던 것이다.
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