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제 체육대회 때 등장하는 국기 중에는 세 개의 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그것을 삼색기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삼색기가 원조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 직후 파리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빨간색 사이에 부르봉 왕실을 상징하는 하얀색을 넣은 휘장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1794년 국기로 제정됐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색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파란색은 자유, 하얀색은 평등, 빨간색은 박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 후 많은 나라에서 자신들의 정신을 세 가지 색에 담아 표현하는 삼색기를 제정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와 평등은 볼테르와 루소의 사상에서 나왔다. 볼테르는 1694년, 루소는 1712년에 태어났으니 볼테르가 열여덟 살 더 많지만, 두 사람은 모두 1778년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살았어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고,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런데 볼테르는 루소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다. 루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보내주신 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들은 당신의 책을 읽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60년 동안이나 그런 습관을 잊고 있던 나로서는 불행하게도 다시 기어 다닌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루소의 호의에 감사하는 형식이지만, 실제 내용은 루소의 저작을 비꼬고 있다. 루소가 보낸 저서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이었다. 여기에서 루소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적 관계를 맺게 되면서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볼테르는 루소가 말한 자연의 상태란 미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볼테르가 오해한 측면이 있다. 루소는 과거에 존재했던 특정 시기를 말한 게 아니었다. 루소의 자연 상태는 가상적인 것이었다. 일종의 ‘사고 실험’이었고, 절대왕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에서 가상 세계를 설정한 것이기도 했다. 일종의 우회 전략이다.
그럼에도 루소는 탄압을 받았다. 루소의 고향인 스위스에서는 루소의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고, 루소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볼테르는 루소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스위스 당국의 탄압에 격렬히 항의했다. 루소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당신이 자신의 사상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죽을 때까지 옹호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볼테르는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루소를 옹호했다. 그래서 루소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면 자신의 집으로 피신하라고도 했다. 그러나 루소는 볼테르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세기적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루소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사회계약론>의 너무나 유명한 한 구절에 담겨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곳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다.” 여기에서 쇠사슬이란 절대왕정 아래의 신분질서를 말한다. 즉, 루소는 인간이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신분질서를 비판했던 것이다.
볼테르는 역사와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는 철학자였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자는 것이라 판단했다. 볼테르의 관심은 현재의 사회를 어떻게 진보시킬 것이냐에 있었다.
볼테르는 일생을 두고 절대왕정과 싸웠다. 볼테르가 택한 방법은 루소와 마찬가지로 우회 전략이었다. 볼테르는 타고난 문필 능력을 발휘해 소설을 썼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 것처럼 소설을 씀으로써 탄압을 피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볼테르 역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바스티유 감옥에 감금당했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망명자가 되어 떠돌아다녀야 했다. 볼테르가 프랑스에 다시 돌아온 것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볼테르의 명성이 높아지자, 프랑스 왕정은 볼테르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테르는 90여 권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중 대표작이 <캉디드>이다. 그 내용을 통해 볼테르가 말하고자 한 바를 보자. 볼테르는 <캉디드>를 두고 “랄프 박사가 독일어로 쓴 글을 번역했다”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랄프 박사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인 것처럼 꾸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 우회 전략이었다.
캉디드는 옛 웨스트팔리아 지방의 한 남작의 성에 사는 청년이다. 조금 어수룩했지만 스승인 판그로스 박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판그로스에 따르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은 원인이 있어 생겨난 결과이므로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캉디드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많은 시련을 겪는다. 판그로스의 말에 따라 지상낙원이라 생각했던 성에서 추방되었고, 돈에 팔려 군대에 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으며, 심지어 화형을 당하기 일보 직전에 살아나기도 했다.
캉디드는 스페인에서 만난 하인의 손을 따라 남미로 갔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솥에 갇혀 삶아질 위기에서 겨우 풀려나기도 했다. 전설적 유토피아인 엘도라도에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지만, 사기를 당해 금과 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캉디드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차 사기를 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캉디드는 판그로스의 말, “원인이 있어 생겨난 결과이므로 현재가 최선이다”라는 말을 믿고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캉디드는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함께 작은 농지를 사서 정착했다. 시간이 흐르자 현재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캉디드가 사랑했던 여인은 외모가 추해지고 잔소리가 심해졌으며 점점 더 쇠약해졌다. 스승인 판그로스조차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해 절망했다.
어느 날 캉디드는 무슬림교도인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아주 작은 땅을 일구며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때 캉디드는 깨달았다. 현재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 스스로 가꾸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는 것을.
볼테르는 자신의 삶을 누릴 자유의 필요성을 말하고자 했다. 그 측면에서 볼 때, 볼테르와 루소의 사상은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누구나 대등하게 자신의 삶을 가꿀 수 있는 사회를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 때 다수의 사람들이 바랐던 사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에 관심이 높다는 사실은 삶을 가꿀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 도입된 주 52시간 노동제는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물론 주 52시간 노동 역시 짧지 않다. 프랑스의 노동시간은 35시간이고, 네덜란드와 스웨덴은 35~40시간이다. 선진국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경제력 측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그 나라들보다 대단히 뒤떨어졌는지 의문이다. 경제력보다 인식과 경제구조의 차이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노동시간의 축소가 삶을 어떻게 바꿀지는 개개인의 삶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