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30 청년들이 바라보는 남북정상회담 “한반도 화해 모드, 실질적 성과 이뤄 쭈~욱 이어가길”
-
1945년 우리는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을 동시에 맞았다. 남북은 오랜 기간 긴장감 속에 살아왔고 2000년에 이르러서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7년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평화의 분위기는 요원해 보였다. 남북의 갈등은 일상이 됐고 두 차례의 정상회담은 2030 세대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았다. 성큼 다가온 2018 남북정상회담, 2030 청년들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4월 17일, 남북 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김선효(23), 2001년 북한을 떠나 남한에서 청년 사업가로 변신한 김성철(33), 서울로터리위성클럽(SYLE)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정민(30), 2010년 남한에 정착해 건국대 국제무역학과를 졸업한 김진미(23)가 그들이다. 평범한 네 명의 청년은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사실에 우선 반가움을 표했다. 이제껏 그랬듯이 만남이 일회성에 그치거나 반목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은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갈 땅이므로. 평소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나? 김진미│북한에 있을 때는 나이도 어렸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도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남북관계 뉴스는 유독 챙겨 보는 편이에요. 북한이 고향이라 그런 것 같아요. 김성철│저도 마찬가지예요. 관련 뉴스들을 최대한 챙겨 보려고 해요. 김선효│평소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대외활동으로 독서모임 남book북 한걸음에 참여하고 있어요. 이런 활동을 통해 남북,통일문제를 정치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남북의 사람 간 유대를 회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갖게 됐어요. 김정민│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있지 않을까요. 저도 대외활동을 하다가 탈북민에 관심을 갖게 됐고 만남을 이어가고 있어요. 대외활동을 하다 보니 의외로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북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런 점은 좀 안타까웠어요. 우리 예술단이 평양에서 공연을 했다. 어떻게 바라봤나? 김선효│평양공연에 레드벨벳이 참가했잖아요. 우리야 너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지만 북한 사람들도 그럴지 의문이 들었어요. 가사에 영어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노래잖아요. 오히려 남북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노래가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김정민│이적, 백지영은 북한에서 인기가 좋다고 하잖아요.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더 갔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김진미│저는 오히려 레드벨벳이 간 게 제일 좋았어요. 엑소까지 갔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북한에 있을 때 아이돌 춤을 배우고 싶어도 영상을 못 구했거든요. 모든 사람이 보진 못했겠지만 평양공연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레드벨벳으로 난리가 났을 것 같아요. 김성철│북한 사람들도 남한의 아이돌 그룹을 다 알 거예요. 2018 남북정상회담이 4월 27일 개최되는데? 김선효│처음 소식을 접하고 엄청 놀랐어요. 역사적 사건이 제 눈앞에서 일어날 거란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요. 바로 친구들과 기사를 공유했죠. 남북 정상이 만나는 모습은 교과서에서나 배우던 일이었거든요. 2007년이면 초등학생 때라 기억이 잘 안 나요. 또 학교에서 배워도 시험 위주로 공부하다 보니. 김진미│북한에서는 그런 내용이 교과서에 아예 없어요. 근대사는 잘 안 다루거든요. 다만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TV로 본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남북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과 사인을 하던 모습이 기억나요. 김성철│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북한에 있었지만 그 모습이 기억나지 않아요. 당시 북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는데 저는 학교를 못 다녔거든요. 많은 또래 친구들이 그랬어요.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남한에 와서 봤어요. 뭔가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죠. 정말 진행이 될까? 통일이 될까?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보다 어린 세대는 10년 전 제가 느낀 감정을 알게 될 것 같아요. 이번 회담이 젊은 친구들이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 큰 계기가 될 거예요. 김정민│제 생각도 그래요. 더욱이 저는 남북정상회담 자체가 주는 의미보다 판문점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에 눈길이 갔어요. 북한 정상이 판문점 우리 영토에 오는 건 처음이잖아요. ▶ (왼쪽부터) 김정민, 김선효, 김성철, 김진미 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바라는 점은? 김진미│북한 비핵화에 대해 확실히 논의했으면 좋겠어요. 핵시설 하나를 포기할 때마다 얼마만큼의 보상을 하겠다는 형태의 구체적 논의가 이뤄져야 해요. 북한이 계속 핵을 보유하고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김선효│전문가들이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 IAEA 사찰을 받고 단계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면은 동감해요. 거기서 더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북한에 원하는 걸 정확하게 제시하고 북한의 요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고 봐요. 한국과 미국이 비핵화만 이야기하고 북한의 안보에 대해 보장해주지 않으면 북한이 의심하고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 수 있잖아요. 우리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북한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일 것 같아요. 김정민│얼마 전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를 봤어요. 2차 세계대전을 일본 관점에서 그려낸 작품인데 전쟁의 참혹함이 느껴지더라고요. 평화의 중요성을 새삼 알게 됐고 정상회담도 이러한 측면에서 진행됐으면 좋겠어요. 또 앞으로는 같은 민족끼리 공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부분이 긴밀하게 논의되면 좋겠어요. 독일이 통일됐을 때 사람들 사이의 문화적 통일이 따르지 않아 마찰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런 과정을 줄여야 하니까요. 김성철│당장에는 힘들겠지만 앞으로 북한이 점진적으로 문을 열도록 논의하는 과정이 더해졌으면 좋겠어요. 북한에 중국 접경 지역과 가까운 곳부터 특구 지역이 늘어야 해요. 예를 들어 나진,선봉 특구 같은 지역이 늘어나 미국, 한국 등 국제 자본이 투자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도록 세밀하게 접근하면 좋겠어요. 다만 투자에 따른 모니터링도 확실하게 이뤄져야겠죠. 이후 북미정상회담도 개최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김진미│북한이 뭔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 평양공연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이 남측 기자단의 취재를 제한한 것에 대해 사과했잖아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에요. 북한이 조금씩 변하고 있기 때문에 북미정상회담까지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선효│북한이 전향적으로 나온 것도 충격이었지만 미국의 태도도 정말 의외였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서로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말폭탄을 주고받았잖아요. 이렇게 180도 바뀔 수 있는 사이라면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어요. 김정민│북미정상회담이 처음 이뤄진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김진미│우리 정부가 외교를 잘한 것 같아요.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을 이뤘고 북한과 미국을 다시 연결시켰어요. 북미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으니 우리 입장에서 손해 본 건 없죠. 이 과정을 묵묵히 이뤄온 우리 정부가 대인배처럼 느껴졌어요. 남북관계에서 바라는 점이 있다면? 김선효│겨울방학에 DMZ에 단체로 견학을 갔어요. 처음에는 왜 가는 건지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느끼는 바가 컸어요. 강원도 지뢰마을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가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했거든요. 무엇보다 평화의 중요성을 절감했죠. 북한에서 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른다는 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불안한 일이에요. 남북이 자주 만나 신뢰를 쌓으면 좋겠어요. 양측에 신뢰가 쌓이면 미사일을 보내겠어요? 그리고 북한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전략적 가치는 더 있겠지만 지도자만 놓고 보면 트럼프 대통령보다 문재인 대통령을 더 믿지 않을까요? 북한과 관계를 이어갈 의지도 그렇고 같은 민족으로서 문 대통령이 말도 더 통할 수 있고요. 정부는 이런 면을 더 활용해서 신뢰를 쌓아갔으면 좋겠어요. 김성철│한반도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큰 움직임에 기대가 돼요.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북한 인권 같은 데 가졌던 관심이 무관심으로 돌아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균형을 맞춰 움직였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남북이 화해 모드를 이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성과가 도출되길 기대해요.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과거처럼 화해 모드와 긴장 모드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독일은 총리가 바뀌어도 통일 정책은 이어졌다고 해요. 정권이 바뀐다고 정책이 바뀌는 건 아닌 거죠. 남북관계 로드맵을 정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정민│정상회담 후에는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더 나아가 남북관계를 이야기하고 그리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길 바라고 있어요. 최근 서울대공원에 가니 정상회담을 기념해 한반도 지도를 벚꽃으로 장식한 걸 봤어요. 이전에는 못 보던 모습이었는데 이처럼 일상에서도 남북관계를 둘러싼 변화들이 많이 보여졌으면 해요. 김진미│결과가 좋으면 모든 국민이 박수를 보낼 거예요.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아름다운 모습이 전개됐으면 좋겠어요. 남북교류도 늘어나서 다음에는 평양공연에 그치지 않고 우리 예술단이 다른 지역도 갔으면 좋겠어요. 함흥에도 가고 청진에도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
-
- 민통선 사과체험농장 이동훈 대표
-
경기 파주시 문산읍 통일대교에서 검문을 거쳐 임진강을 건너면 도라산역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좌회전하면 디엠지플러스란 간판을 단 사과농장이 눈에 띈다. 이동훈(31) 디엠지플러스 대표가 운영하는 민통선 안의 사과농장이다. ⓒ디엠지플러스 이동훈 대표는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대학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법조인을 꿈꾸며 법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학과 공부는 이 대표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법학과의 특성상 로스쿨이나 사법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진로에 대해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그게 최선인 줄 알고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재미없는 시험공부에 매달려 허송세월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마음속에 있던 게 창업에 대한 꿈이었죠. 이 대표는 성균관대 창업동아리협의회(S-forum)를 만들었다. 학교 최초로 창업 동아리를 만든 그는 리더십을 발휘해 동아리를 이끌어가는 동시에 창업에 대한 꿈도 키워갔다. 경기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에 위치한 6600m2(2000평) 남짓한 사과농장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찾기로 했다. 10년 전 출판사를 운영하다 귀농한 아버지를 따라 농촌에서 흙과 살기로 다짐한 것이다. 막상 귀농한 아버지와 함께 사과농장을 하기로 했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저온창고에 쌓인 사과들을 보며 과연 저것을 어떻게 팔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다. 청정 지역을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 아버지가 고생하며 키운 사과를 제값에 팔지 못하시더라고요. 경북 지역의 사과에 비해 파주 사과는 인지도가 너무나 낮았거든요.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젊은이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밀어붙이면 못할 것도 없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농장 인프라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제품을 가공하면 좋은 창업 아이템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대표는 60년 가까이 사람의 발길이 끊긴 덕분에 어느 곳보다 청정한 지역인 DMZ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DMZ에서 따왔다. 그는 저온창고를 가득 채운 사과부터 판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창고를 둘러보다 상자에 들어 있는 사과를 하나 집어 장갑으로 먼지를 대충 닦고 한입 베어 물었더니 꿀사과였다. 당도측정기로 당도를 재봤더니 17브릭스(Brix)가 나왔다. 시중에 팔리는 꿀사과가 보통 12~13브릭스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당도였다. 당도에 자신이 생기자 이 대표는 창고에 가득 쌓인 사과로 주스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2015년 이 대표는 농림축산식품부의 6차 산업(1차 산업인 농수산업과 2차 산업인 제조업,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이 복합된 산업) 사업체로도 인증을 받았다. 2015년 4월 현대백화점 송도점에 입점해 판매를 시작했다. 농장에서 수확한 사과로 파머스 애플이라는 이름의 사과 주스와 디톡스(해독) 주스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이 설탕 시럽을 넣은 거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러나 사과 세 개를 갈아 소비자에게 4900원에 판매했으니 수지가 맞지 않았다. 1년 정도 운영하다 아쉽게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파머스 애플 주스의 폭발적 반응으로 장단면과 군내면 일대 농가의 사과까지 소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농산물 가공 산업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했다. 올해로 5년 차에 들어가는 청년 농사꾼 이 대표에게 DMZ는 기회의 땅이다. 이 대표는 2015년부터 재미있는 DMZ라는 콘셉트 아래 안보 관광객 홍보와 유치를 위해 신경 쓰고 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군 농장 인프라를 활용해 수익을 내겠다는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지역적인 특성과 놀이 형태를 결합해 테마가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다. 이 대표는 사실 파주는 제주나 남이섬처럼 볼거리, 먹거리가 다양한 손색없는 관광지라며 DMZ 관광객들이 파주의 진면목을 모르고 임진각, 도라산전망대, 평화공원, 땅굴 견학을 하고 나면 더 이상 볼거리가 없다면서 아쉬워했다고 했다. 그는 기업들이나 외국 관광객, 그리고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수확 체험, 안보 관광을 연계한 관광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농장 안에 컨테이너를 개조해 주방을 만들었다고 했다. ▶ 이동훈 대표가 디엠지플러스의 농촌체험학습장에서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초콜릿 애플 만들기 시범을 보 이고 있다. ⓒ디엠지플러스 DMZ 사과를 활용해 평소 요리를 잘 하지 않는 아빠가 초콜릿을 뿌려 초콜릿 애플을 만들어주면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엄마는 족욕과 다과로 피로를 풀고, 아이들은 비무장지대의 깨끗한 생태환경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온 가족이 놀이라는 형식을 통해 신선한 로컬 푸드가 외국산 농산물보다 얼마나 맛있고 좋은지를 함께 직접 체험해보는 게 목적이지요. 이 대표는 하루쯤은 베짱이처럼 즐겨보자는 의미로 베짱이학교 프로젝트를 운영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자금 확보를 위해 투자자도 찾아봤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중 관광 공모전을 알게 돼 지원했죠. 안보 관광 연계 농장 체험관광 프로그램 만들어 이 대표의 아이디어는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제4회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이 대표는 입상과 동시에 창업자금을 지원받았고, 그 덕분에 지난해 아버지의 사과농장 바로 옆에 베짱이학교 체험장을 조성할 수 있었다. 2015년에는 메르스 여파로 관광객 방문이 주춤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총 3000여 명이 체험시설을 찾았고, 대기업 등 기업체 25곳에서도 체험장을 이용했다. 현재는 체험시설을 확장하기 위해 준비 중이고, 건축 허가를 마치는 대로 오픈할 계획이다. 농장 한편에서는 백화점에서 대히트를 쳤던 파머스 애플 주스도 재개할 계획이다. 이 대표의 꿈은 단순히 수익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농업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저도 수입이 아주 많거나 안정적이지는 못해요.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생긴 저만의 신념도 있고, 이렇게 준비하다 보면 기회도 생긴다는 걸 체감했기에 늘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이동훈 대표는 DMZ 지역에서 농촌 사업을 시작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며 그런 점에서 남북관계의 해빙에 따라 DMZ 지역은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땅이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청정 지역이라고 했다. 오동룡│위클리 공감 기자
-
- 갖고 싶다 ‘국립 굿즈’
-
트렌드 갖고 싶다 국립 굿즈 국립 굿즈(NG, National Goods)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굿즈(Goods) 자체만 따지면 특정 장르나 인물의 정체성을 상징하기 위해 제작된 상품을 가리키는데, 국립 굿즈는 조금 다르다.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제작한 기념품이자 상품이라는 점에서다. 일각에서는 국립 굿즈 열풍이라고 일컬을 만큼 해당 굿즈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분위기다. 일명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중심으로 굿즈를 구매하는 과정과 소유의 기쁨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공유하는 경험 소비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값비싼 물건이 소유의 만족감을 드러낼 수 있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물건을 선호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롱패딩과 수호랑 인형으로 대표되는 평창동계올림픽 굿즈의 인기 사례를 들 수 있다. 지난 1월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시장 조사기관 두잇서베이가 공동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남녀 3700명 중 83%가 평창올림픽 굿즈 구매의사가 있다고 답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국제 스포츠 행사를 모티브로 한 기념품의 인기가 주목할 만한 부분이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정부나 공공기관이 만든 기념품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평창 굿즈 이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제작한 기념품은 촌스럽다는 편견이 강했다. 행사명 또는 기관명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탓에 활용도가 낮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국립 굿즈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요즘 기념품은 달라졌다. 평창 롱패딩 안감에 평창 로고가 박힌 것이 대표적이다. 세련된 디자인에 실용성을 더하자 없어서 못 파는 품목이 생길 정도다. 청와대 대표 기념품 이니 시계가 희귀템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굿즈 또한 굿즈 열풍에 한몫하고 있다. 이들 굿즈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회화 등을 기반으로 한 기념품을 말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세대는 기존세대와 다르게 세련된 문화적 기호로 사회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와 같은 정체성을 방증하는 가장 좋은 예가 국립 굿즈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국립 굿즈. 과거 국가 기념품과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립 굿즈를 찾아 그리고 굿즈를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
-
- 우리는 쇼핑하러 박물관에 간다
-
지난해 말은 그야말로 평창 롱패딩 대란이었다. 평창 롱패딩을 구매하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는 사람, 매장 개점 시간보다 훨씬 앞선 새벽부터 줄을 섰다는 사람 등 연일 빚어진 진풍경은 평창 굿즈의 인기를 체감하기에 충분했다. 이를 두고 단지 올림픽 기념품이라는 희소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평창동계올림픽이 폐막한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평창 굿즈를 찾는 사람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평창 굿즈로 촉발된 굿즈 흥행은 국립중앙박물관 굿즈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국립 굿즈 열풍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굿즈는 이미 온라인상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굿즈계 강자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회화 등을 모티브로 세련되면서도 실용성까지 갖춘 게 특징이다. 이전에는 문구 사무용품에 그대로 사진을 얹는 형태였지만 훨씬 다양화된 품목에 감각적인 디자인을 입혔다. 대표적으로 초충도 시리즈는 신사임당의 8폭 병풍 속 초충도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해 심플함과 여성적인 색감을 강조한다. 초충도 자체를 입히기보다 에코백과 트레이, 파우치 등 다수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의 특성에 맞게 디자인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가 기록된 를 모티브로 한 의궤 시리즈도 있다. 의궤 넥타이, 의궤 손수건, 의궤 3단 우산, 의궤 금속 명함집 등 여러 생활용품으로 구성됐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판매 중인 문화상품만 해도 3000종에 이른다. 심미성에 실용성까지 더해져서일까. 굿즈를 사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다는 사람도 많다. 지난 4월 11일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상품점에서 만난 60대 주부 김 모 씨는 보석함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SNS 게시물을 보다 국립 굿즈를 알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보석함이 유독 눈에 들어와 직접 확인하고 구매하러 왔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일반 매장에서 판매되는 보석함과 비교했을 때 외관상 전혀 뒤처지지 않음에도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며 다른 굿즈들도 함께 살펴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20대 직장인 이 모 씨는 별 헤는 밤 유리컵을 구매하겠다는 일념으로 박물관에 왔다고 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별 헤는 밤을 모티브로 한 별 헤는 밤 시리즈는 주요 시구들이 떠다니는 듯한 모습으로 유명한 굿즈다. 특히 이 씨가 언급한 유리컵은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 굿즈 판매 순위 6위를 기록했을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관계자는 박물관 기념품은 늘 있었지만 과거보다 실용성이 강화되면서 호응을 얻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해 판매 순위 1위는 왕과 왕비 수저 세트였는데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굿즈라는 점에서 높은 실용성을 자랑한다. 가성비 측면도 놓칠 수 없다. 문화재단 관계자는 가격 책정에 다양한 요인이 반영되지만 공공기관이 만드는 제품이기 때문에 마진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며 선물로 주고받기에도 부담 없는 가격대가 되도록 신경 쓴다고 설명했다. ▶핀란드인 방문객들이 국립 굿즈를 살펴보고 있다.ⓒC영상미디어 두 손 가득 국립 굿즈를 들고 다니는 외국인 방문객의 모습도 꽤 흥미로웠다. 한 프랑스인은 한국 고유의 문화를 기념품에 아름답게 녹여낸 것 같다며 엽서 말고도 종류가 굉장히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국인 방문객은 국립 굿즈를 본 소감을 묻는 질문에 생각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은 좋지만 정확히 어떤 유물인지 알 수 없는 점은 아쉽다고 답변했다. 온라인 매장,입소문 힘입어 평창 굿즈와 국립 굿즈가 흥행할 수 있었던 건 정부가 만든 기념품은 촌스럽다는 편견을 깨뜨린 덕분이다. 일례로 평창 롱패딩은 국내 최신 패션 트렌드를 크게 반영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또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유행을 감안해 장갑을 낀 채 엄지와 검지를 겹쳤을 때 하트가 될 수 있도록 한 핑거하트 장갑도 있다. 온라인 매장을 운영함으로써 다양한 연령대를 잡을 수 있다는 점도 주효했다. 문화재단 공개 자료를 보면 오프라인 매장은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아 자녀가 있는 30~40대의 구매 비중이 높은 한편, 온라인 매장의 경우 10~20대의 구매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문화재단 관계자는 최근 4~5년 전부터 온라인 중심 구매가 활성화되고 있다며 매출로 따지면 10배가량 증가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상품점에 진열된 국립 굿즈. 박물관이 보유한 유물과 회화를 모티브로 현대적 감각을 더해 제작됐다.ⓒC영상미디어 입소문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평창 팝업 스토어 관계자는 롱패딩 대란 당시 기존 마케팅 채널을 통해 다양하게 홍보를 했지만 이 패딩이 과연 될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착용해본 고객들의 바이럴 마케팅(누리꾼이 자발적으로 홍보하는 방법)이 급물살을 타면서 대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문화재단 관계자 또한 생산자가 제품을 잘 만들었다고 해서 히트 상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이용하고 스스로 알려야 한다며 국립 굿즈의 인기 배경에는 이용자 자체 홍보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
-
- 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립 굿즈’는
-
정부가 만든 기념품이라고 해서 멀리한 적은 없었나. 과거에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없어서 못 팔고 못 사는 굿즈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기에 국립 굿즈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일까. 국립 굿즈를 만드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어봤다. 디자인, 실용성 둘 다 잡아야 좋은 굿즈이승휘 평창 굿즈 마니아 #반다비 #수호랑 #평창 굿즈.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이승휘 씨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가장 많이 언급된 해시태그들이다. 해시태그는 게시물에 다는 일종의 꼬리표다. 특정 단어나 문구 앞에 #를 붙여 연관된 정보를 한데 묶을 때 사용된다. 이승휘 씨가 어떤 종류의 게시물을 올렸느냐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셈이다. 본래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는 이 씨에게 평창 굿즈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수호랑과 어사화를 쓴 반다비처럼 귀여운 인형을 수집한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평창동계올림픽 현장을 찾았다가 수호랑 탈을 쓴 자원봉사자의 몸짓이 인상 깊었던 게 계기였다. ⓒ이승휘 인형은 말할 것도 없고 후드 티셔츠와 신발, 배지 등 웬만한 평창 굿즈는 전부 보유하고 있어요. 평창올림픽 고유의 특징을 잘 살린 기념품들이죠. 굿즈라는 개념을 안 것도 굿즈를 모으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전이지만 평창 굿즈처럼 한 종류를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에요. 평창 굿즈를 선택한 이유는 비단 심미성만은 아니었다. 이 씨는 평창 굿즈의 구매 이유로 높은 실용성도 꼽았다. 평창 굿즈는 동계올림픽이라는 계절적 특수성을 감안해 털모자와 목도리, 장갑, 핫팩 등도 제작됐는데 이 중 담요와 장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따뜻한 굿즈였다. 또 안마봉, 목베개, 볼펜 등 굿즈는 더는 소장용이나 관상용이 아닌 생활 속에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창 굿즈를 하나하나 모으면서 꽉 차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게 수집하는 즐거움입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 있고 일상에서 활용하는 데 무리가 없는 것이 좋은 굿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평창 굿즈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가 모아온 평창 굿즈만 20여 종. 적어도 100만 원 이상이 소요됐단다. 그렇지만 그는 또 다른 국립 굿즈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면서 소장가치와 활용가치가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굿즈 마니아로서 지역별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국립 굿즈도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를테면 고양시 마스코트인 고양고양이가 있잖아요? 평소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캐릭터를 굿즈로 만들면 여러모로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전형적인 틀 깨고 현대적 눈높이 맞췄죠문현상 국립박물관문화재단 문화상품팀 팀장 ⓒC영상미디어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얼핏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이 문구는 언젠가부터 인기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이 문구와 함께 회자되는 무언가라면 충분한 소장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다. 그렇다면 요즘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국립 굿즈라고 답할 수 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이 제작한 굿즈라고 해서 붙여진, 이용자들이 만든 이름이다. 과거 박물관 기념품은 애매한 포지션이었습니다. 기념품과 생활용품의 경계선에 있었다고 봐야 할까요. 그런데 굿즈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아트 상품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됐어요. 그동안 교육적 가치에 방점을 두고 제작돼 구매자로 하여금 피로감을 줬다면 기능성을 갖춘 기념품으로 진화하고 있는 거죠. 문현상 팀장에 따르면 상품 개발은 꽤 오래전부터 진행돼왔다. 재단에서 지난 10년간 꾸준한 개발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대중이 좋아할 수 있는 방향을 잡게 된 것이다. 2010년 초반부터 사회관계망 기반의 정보 공유가 활발해지면서 품목 다변화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문구 사무용품이 전체 상품의 70%를 차지했던 이전과 달리 생활 소품, 패션 잡화 비중을 60~70%로 늘렸습니다. 자신이 구매한 제품과 그것을 활용하는 경험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죠. 디자인 면에서도 변화를 줬다. 박물관이 보유한 유물의 모습을 그대로 새겨내는 대신 현대적 눈높이에 맞췄다. 유물이라 해도 버릴 것은 과감하게 뺐다. 대표적으로 신사임당의 초충도에서 별도로 뗀 수박 그림을 파우치에 반복 프린팅하면서 디자인의 통일성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윤동주 유리컵에는 시 별 헤는 밤의 일부를 넣어 감성적이면서도 섬세한 분위기를 살렸다. 국립 굿즈 열풍의 숨은 조력자로 이용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국립 굿즈는 공식적인 홍보 활동보다 이용자들의 입소문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이 사랑해주고 나서서 홍보해주는 것만큼 대단한 것은 없어요. 국민의 성원이 국립 굿즈 인기의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많이 써보시고 불편한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해주세요. 이용자와 소통하며 만들어진 상품은 국립박물관을 대표하고 결국 한국을 대표하는 굿즈가 될 테니까요.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
-
- 어서 와~DMZ 마을은 처음이지?
-
남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마을을 아시나요? 내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지만, 행정구역상으로 경기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다. 분단의 상징일 수도 있으나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 위 : 마을 기록관에 전시된 대성동 자유의 마을 지도.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남북 민간 거주 마을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아래 :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 평화의 마을. 남과 북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겨우 800m밖에 되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에 남북이 각각 한 곳씩 민간 거주 마을을 두기로 합의하면서 8월 3일 북한 기정동 평화의 마을과 함께 생겼다.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기껏해야 800m 정도다. 판문점 우리 측 지역에서 열리게 될 2018 남북정상회담을 20여 일 앞둔 4월 4일 정책브리핑이 어렵게 찾은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을을 둘러보고 김동구(49) 이장과 마을 주민들을 만나 그곳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마을 기록관에 전시돼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 지도. 비무장지대 내 유일한 남북 민간 거주 마을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유엔군사령부 관할 군복무,세금은 면제 마을 이름은 처음 토성(土城)이었으나 태성(台城)이라고 불리다가 유엔군이 대성으로 발음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동구 이장은 군사분계선 가장 가까이 팔각정이 있는 자리에 언제 축조됐는지는 확실치 않은 옛 토성이 있어 태성이라고 불렀고 그 주변에서 기와 등이 많이 발견됐다고 어르신들께 전해 들었죠라고 설명했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 일명 자유의 마을은 특이하게 대한민국 법률에 따라 규제를 받지만 유엔사령부의 통제 아래 있다. 판문점과 다르게 일반인 관광은 불가능하며 주민들의 출입까지 통제되는 곳이다. 외부인은 마을 주민의 초대로 사전에 신청한 사람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그것도 정해진 시간만 출입할 수 있으며, 출입 시 JSA 민정중대의 경호를 받아야 한다. 마을 주민들도 출입 시 사전에 통보해야 하며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된다. 저녁 7시에는 민정중대가 가구별 인원 점검을 한다. 마을의 위치적 특성상 민정중대가 24시간 상주하고 있어 치안 유지는 확실하다. 주민 전창복(63) 씨는 옴짝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불편합니다. 그래도 지켜주니깐 고맙죠, 덕분에 안전합니다라고 말했다. 전 씨는 자유의 마을에서 태어나 63년 동안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전 씨와 같이 휴전 당시 이곳에 주소지를 둔 사람이거나 그 직계가족이다. 전 씨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이곳이 고향이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DMZ 내에 살다 보니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구 수가 얼마 안 돼 조용하고 가족같이 지내고 있어 좋아요라고 말했다. 자유의 마을은 지난해 기준, 49세대 193명이 거주하고 있다. 교통수단은 버스와 자가용이다. 버스는 문산까지 가는 1개의 노선이 하루 3회였다가 올해부터 4회 운행 중이다. DMZ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은 남북이 합의한 대로 청색 천을 달아야 한다. 김 이장은 과거에는 교통수단이 없어 일주일에 한 번씩 미군들이 주민들을 문산까지 데려다줬죠. 그때 비하면 많이 수월해진 편이라고 했다. 통제가 있어 불편한 만큼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 혜택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고 있다. 병역 면제에 악용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시집온 며느리는 주민이 될 수 있지만, 외부 남자와 결혼한 딸은 마을을 떠나야 한다. 또한 거주권 심사가 까다로우며 8개월 이상 계속 살지 않으면 주민 자격이 상실된다. 단,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타지로 나가는 경우는 제외된다. 주민들은 개인소유권은 없고 경작권만 인정돼 쌀, 콩, 고추 등을 주로 재배해 경제적인 수입을 얻고 있다. 쌀은 정부가 30%, 지역농협 쌀종합처리장(RPC)이 50%, 자체 RPC에서 약 20%를 수매한다. ▶ 1 김동구 이장이 마을기록관에서 마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2 마을 주민인 전창복 씨가 농사일을 마치고 환하게 웃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 특히 이 지역은 DMZ 접경 청정지역이라는 특성을 살려 고부가가치의 쌀을 생산한다. 하지만 외부 인력의 출입이 어려워 일손 부족으로에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지 못 하는 어려움도 있다. 김 이장은 예전에는 인삼도 재배했었는데 인력이 부족해 지금은 못 하고 있죠. 농업도 기계화가 돼 예전보다는 수월해졌지만, 정부에서 말하는 농업의 6차산업화까지 발전시키기는 어려움이 많죠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특수한 마을, 교육환경도 특별해 경쟁률 높다 ▶ 1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유일하게 다니는 대중교통인 따복버스. 자유의 마을과 문산을 오가며 새벽 6시를 첫차로 하루 4회 운행된다. 2 비무장지대 내 하나뿐인 대성동초등학교 모습.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체육시간을 보내고 있 다. ⓒ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 자유의 마을 유일한 교육시설은 대성동초등학교와 유치원이다. 대성동초등학교는 6,25전쟁 이후 1954년 주민자치로 운영되다가 1968년 5월 8일 대성동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으며 3학급으로 개교했다. 현재 학생 수는 학년당 5명씩 1학급, 즉 6학급으로 편성해 총 30명이고 교사 및 행정직원 수가 22명이다. 입학 자격은 마을 주민이어야 하고 외부인은 추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일반 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교육환경으로 외지에서도 인기가 많다. 대성동초등학교는 한때 신입생이 없어 폐교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지역의 역사를 볼 때 존재 가치가 커 2006년 공동학구로 지정하고 외부 학생의 입학을 허용했다. 진영진(61) 교장은 자유의 마을이 처음 생기게 된 계기가 평화의 시작이며, 통일과 관련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상징성이 크죠. 많은 사람들이 비무장지대 내에 학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특히 외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라고 설명했다. 올해로 49회 졸업식을 거치면서 많은 학생을 배출했다. 교육과정은 일반 학교와 동일하다. 다만 스쿨버스 출입 시간이 정해져 있어 방과 후 교육활동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며 무료다. 이상재(43) 교사는 학급 수가 적다보니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느낌이랄까요, 선생님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입니다. 6개월만 지나면 전교생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어요라며 체험학습,특별활동 등 다른 곳과는 차별화된 좋은 교육환경을 자랑했다. 또 일반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체험학습도 특징이다. 학생들은 어린이 외교관, DMZ국제영화제 참가, 각국 대사관 공연 등 특별활동도 많이 한다. 체험학습은 최소 한 달에 한 번, 그때그때 필요한 전문 강사를 초청하거나 외부로 나가 진행한다. 이 교사는 영어 교육의 경우 원어민 교사에게 배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지금처럼 국가적으로 특수한 경우만 아니면 미국 군인도 와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해요라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대성동초등학교는 2014년 KT의 지원으로 기가스쿨을 개관해 스마트 교실인 기가클래스와 사물인터넷 창의교육을 할 수 있는 무한상상교실을 만들었다. 비무장지대 내 영화관, 가봤니? ▶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2012년 경기도,롯데시네마와 협약을 체결해 DMZ 내 최초로 영화관을 개관했다. 상영 날짜는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 자유의 마을 내에는 편의시설조차 없는데 영화관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DMZ 내에서 영화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 영화관은 마을회관 2층을 개조해 만들었으며 마을 내 유일한 문화시설공간(총 52석)으로 주민들에게 인기다. 김 이장은 2012년 경기도,롯데시네마와 협약을 체결하고 영화관을 만들었는데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에 무료 상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상영한 적이 있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자유의 마을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북한. 국기 게양대는 물론 기정동 평화의 마을, 개성공단 등이 한눈에 보인다. 마을회관은 1997년 신축되면서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마을식당과 경로당, 구판장, 회의실과 롯데시네마(영화관) 등으로 구성됐다. 마을회관 시설 중 꼭 가볼 만한 곳은 옥상에 있는 전망대다. 이곳에서는 북한의 국기 게양대, 개성공단과 기정동 마을, 개성 송악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망원경으로는 기정동마을 주민들의 모습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옥상에서 본 국기 게양대는 남과 북이 경쟁하듯이 마주하고 있다. 자유의 마을 국기 게양대는 99.8m의 국내 최고 높이를 자랑하며 태극기 크기는 가로 18m, 세로 12m에 달한다. 김 이장은 국기 게양대는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시설물로 북한에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높게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건너편 기정동 마을 국기 게양대는 원래 80m 남짓이었지만 남한을 의식한 듯 165m 높이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 통일이 된다면 관광지로 주목 받을 만한 곳이 있다. 정전협정 관련 문서, 군사분계선 표식, 마을의 역사, 주민들을 담은 영상 등 자유의 마을 65년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는 마을 기록관이다. 지난 1959년 지어진 마을 공회당인 자유의 집은 폐건물이 될 뻔했으나,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행정자치부와 대성동 프로젝트를 진행해 2016년 6월 3일 마을기록관으로 재탄생했다. 김 이장은 현재 외부인 출입 통제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없으나, 통일이 된다면 이곳이 또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자신 있게 소개했다. 오는 4월 27일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리게 될 역사적인 2018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은 어떨까? 아무래도 느낌이 일반 국민들과는 다르겠지만 반응은 대체로 차분했다. 김 이장은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다보니 내,외신 기자들이 우리 마을에 관심을 너무 많이 가져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통일이 된다면 우리 마을이 가지는 상징성이 커 역사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겠죠. 이번 정상회담이 잘 되길 바라며 이장으로서 우리 마을이 잘 보존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
-
- “ ‘홍익인간호’ 몰고 북한까지 달리고 싶어요”
-
교단에 선 지 30여 년. 정년퇴직까지 4년 6개월 앞둔 어느 날 학교를 그만뒀다. 교단을 내려오며 받은 퇴직금은 25인승 중고 버스를 구매하고 시설을 갖추는 데 써버렸다. 이유는 단 하나, 방방곡곡에 통일의 필요성을 알리고 싶다는 오래전 소망 때문이었다. 60대 평범한 국어교사에서 평화운동가로 나선 김승식 씨의 이야기다. ⓒC영상미디어 김 씨는 2018년 4월 9일부터 2022년 8월까지 전국 17개 시,도 마을 곳곳을 누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퇴직금으로 마련한 빨간 중형 버스 홍익인간호가 그의 발이 되어 함께한다. 일명 프로젝트 K2 2022, 김 씨가 목표로 하는 이번 과제의 이름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지만 가장 오르기 어려운 산은 K2(고드윈오스턴산)라고 해요. 길이 험준해 함부로 도전하기 어려운 산이에요. 나 홀로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프로젝트 명으로 짓게 됐어요. 2022는 원래대로라면 교직생활을 공식적으로 내려놓게 되는, 동시에 이번 여정의 끝이 되는 시점을 가리켜요. 출발지는 김 씨의 고향인 전남 강진군 성전면 명동마을이었다. 이곳을 시작으로 남부권, 제주도, 중부권까지 순차적으로 움직일 계획이다. 김 씨는 마을 주민들에게 통일을 주제로 한 시청각 자료를 제공하며 담소를 나눈다. 문화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농어촌 현실을 감안해 일종의 재능기부인 색소폰 연주도 준비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현장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직접 내린 따뜻한 음료를 어르신들에게 대접하며 마을 환경 정화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운전하는 버스 안에는 여느 버스와 달리 별게 다 있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간이침대와 작은 싱크대, 노래방 기계, 빔 프로젝터, 커피 머신 등 김 씨가 직접 개조하고 마련한 것들이다. 차량 지붕에는 장기간 바깥 생활에 대비하기 위한 태양광 장치도 달았다. ⓒC영상미디어 평화 염원 여정, 누군가 꼭 해야 할 일 통일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단지 한민족이었던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면서까지 결심한 일이 이것이냐며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온전히 응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씨는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며 굳건한 의지를 보였다. 젊은 시절 방송으로 보았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어서다.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지구촌 시대에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남매가 만날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잖아요. 통일의 필요성을 논하기에 이산가족 문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일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그것을 어떤 형태로 구체화할지 결정한 건 12년 전이에요. 기동력을 가질 수 있는 버스가 딱이죠. 요새는 캠핑카로 세계를 도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무턱대고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김 씨는 다섯 가지 배경 요소를 들며 프로젝트 K2 2022의 성공 가능성을 전망했다. 가장 먼저 통일과 평화라는 충분한 대의명분이 전제됐고 그것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도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세 번째 요소는 도움인데, 김 씨가 수집한 자료들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 도움을 받았다. 또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에 이은 남북 합동 공연, 개최를 앞둔 남북정상회담 등 최근 시류와 통일 운동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1인 활동이기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홍보는 더욱 필요한 부분이라고도 덧붙였다. 장기간 활동을 계획하는 만큼 수익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버스 한편에 마련된 동행 모금함이 해결책이다. 그는 모금함을 후원의 개념으로 생각하기보다 함께 달린다는 의미의 동행으로 봐주시면 좋겠다면서 개인 생활비 절약도 병행하면 문제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훨씬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 대신 깊숙한 마을을 목적지로 선택한 이유를 묻자 흐트러지지 않고 책임감을 갖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3월 31일 자신의 활동 계획을 알리는 출정식을 연 것도 이 때문이다. 목적의식을 보다 뚜렷하게 함으로써 향후 여정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맞서려 한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고 했다. 김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분이다. 고향에 아버지의 공적비가 세워졌는데 그것을 보며 나도 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통일 운동은 그가 생각하는 봉사의 일환인 셈이다. 버스 전면에 홍익인간이라는 문구를 붙였어요.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제가 평생 지켜온 신념이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비록 통일 전문가는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통일을 꾸준히 이야기하고 공감하다 보면 통일을 앞당기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여정 중 언젠가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돼 버스를 몰고 북한까지 갈 수 있길 바라봅니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
-
- 이산가족·실향민의 포기할 수 없는 희망
-
함경도 우리 고향 앞 바닷가로 나가는 길에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옹달샘 물 한 잔 떠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던 기억이 나요. 고향 옹달샘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그 옹달샘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마 우리가 마지막이겠지요. ▶2000년 서울 워커힐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모습ⓒ뉴시스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기자와 마주 앉은 실향민 김송순 할머니가 68년 전 6,25전쟁 중 떠나온 휴전선 넘어 함경도 고향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4월 27일 열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6,25전쟁 당시 고향인 북한 지역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을 만났다. 10년 전 동생 살아 있다는 소식 듣고 꿈만 같았어요 ▶김송순 할머니ⓒC영상미디어 김송순 할머니는 1950년 홀로 고향 함경남도 북청을 떠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 모두 고향에 남겨둔 채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지 68년이 흘렀지만 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너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며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이 겪고 있는 애절함보다는 나은 형편이라고 했다. 10여 년 전 친동생이 북한 고향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이지만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확인할 수 있기에 가슴 한곳을 억누르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알지도 못했다며 이들이 보냈을 힘든 세월을 생각하면 늘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10년 전 처음 고향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가 막혔지요. 동생이 보내준 편지를 보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계속 흘렀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동생이 보낸 편지로 처음 알게 됐는데 제 마음이 어땠겠어요. 형제들도 다 세상을 등지고 동생 한 명 살아서 가족이며 고향 이야기를 그렇게 편지에 적어 보내준 거예요. 그 편지를 잡고 있는 손이 너무 떨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김 할머니는 곧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신문과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 기대와 바람, 그리고 걱정과 아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후 혹시라도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기대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되면 수많은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에게 또 다른 아쉬움과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제 나이 이제 90입니다. 68년 전 헤어진 동생과 하룻밤만이라도 얼굴 맞대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70년 가까운 시간 떨어져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족이 만나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면 68년 만의 만남이 더 큰 아픔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실향민,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각하는 결정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
- “가족 생사조차 모른 지 68년째예요”
-
▶ 최영선 할아버지 ⓒC영상미디어 최영선 할아버지 역시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이다. 6,25전쟁 당시 홀로 남한으로 내려왔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에 남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크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에 남은 가족과 친척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최 할아버지는 단 한 명의 생사라도 알 방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 할아버지도 북한에 남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보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다. 최 할아버지는 피난해 남한으로 내려온 후 고향에 살던 가족이 어느 순간 완전히 흩어져버린 것 같다며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가족과 친척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기자에게 설명하는 최 할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지금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 찾는 일을 멈춘 상태라며 아쉽다고 말했다. 최영선 할아버지는 68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손 한 번 잡아보고, 얼굴 한 번 맞대고 문질러보고 싶은 게 당연한 심정일 것이라며 그런데 여전히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최 할아버지는 68년 전 헤어져 북한에 남겨진 누이동생을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놓았다. 살아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서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북한 측이 확인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며 우리 정부와 북한 측이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만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이제는 고령이 된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바람을 귀담아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조동진│위클리 공감 기자
-
- “북한 사는 누이 편지에 온종일 울었어요”
-
김경재 할아버지도 6,25전쟁 중이던 1950년 함경남도 북청을 떠났다. 하지만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과 친척 절반 이상이 고향 북청에 그대로 남겨졌다. 68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북한에 남겨진 부모님과 형제, 친척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속만 태우며 수십 년을 살고 있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김경재 할아버지 ⓒC영상미디어 김 할아버지 역시 북한에 두고 온 누이동생과 사촌이 고향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1950년 겨울 피난길에 올라 남한으로 내려온 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던 1990년대 중반 누이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이 잠깐이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북한 출신 사람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한 적이 있었다며 이때 미국에 살던 고향 선배 한 명이 북한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사촌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알려줬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지인이 가져다준 누이동생의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몇 번 기절했을 만큼 울었다. 더구나 사진 속 누이동생이 자신이 북한을 떠날 때까지 살던 고향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더욱 메어왔다. 김 할아버지는 동생이 68년 전 살던 옛날 집 대문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며 꿈인 것 같았다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라도 보내기 위해 거주지를 일본으로 옮겨 생활하기도 했다. 또 동생 소식을 듣기 위해 중국을 찾기도 했다. 혹시라도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싶어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에도 신청을 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에게 동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껏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 손에 넣을 수 있는 동생 편지를 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10대 중반 정도의 나이는 돼야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여든 살에서 아흔 살이 넘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령인 실향민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래도 죽기 전에 고향에 한 번 가봤으면, 그리운 가족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을 위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했다. 김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반복돼왔던 것처럼 매우 적은 수로 제한된 이산가족 대상으로 북한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정도를 넘어서는 논의가 됐으면 좋겠다며 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워하던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했다. 조동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