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민의 고래우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
웹툰 [신정민의 고래우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

01 고래는 가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를 때가 있어요. 머릿속이 눈처럼 하얗거나 밤처럼 까매져서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요. 손에 잡히는 일도 없어요. 그럴 때면 고래는 마음이 조급해져요.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 뭐라도 해야 할 텐데발을 동동 구르던 고래는 없던 일을 만들기로 해요. 02 청소를 해볼까? 고래는 일부러 집 안을 마구 어질러놓고는, 쓸고 닦고 치우다 털썩 주저앉아요. 이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야. 요리를 해볼까? 고래는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만들고는, 먹다 먹다 산더미처럼 남겨요.휴! 이건 백 배는 더 쓸데없는 짓이야. 03 에라,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 고래는 텔레비전을 켰어요. 하지만 이것도 뭔가를 하는 셈이지. 아무것도 하지 말기로 한 김에 고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 보기로 했어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쉬던 고래는 제 머리를 콩 쥐어박았어요. 쉬는 것도, 자는 것도, 뭔가를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뭔가를 하는 거야.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04 고민 고민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나를 남처럼 생각해볼까? 그러면 내가 무얼 해도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그나마 제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셈이지. 그렇게 마음먹으니 갑자기 제 방이 남의 방 같았어요. 고래는 낯선 이의 집을 구경하듯 천천히 둘러보았어요. 매일 보던 것들, 조금 전까지 쓰던 물건들이 낯설게 보였어요. 어디선가 주워온 돌멩이, 오래전에 읽다 만 책들, 몇 년째 똑딱거리는 시계와 익숙한 벽지도 처음 보는 것 같았어요. 05 이 친구는 무얼 먹고 사나? 냉장고를 열어본 고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흠 이런 걸 먹고 사니 자꾸자꾸 살만 찌지. 옷장을 열어본 고래는 고개를 저었어요. 쯧쯧 촌스럽기 짝이 없는 옷들에, 온통 뒤죽박죽이라니! 서랍을 열어본 고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이런 건 뭣 하러 모아둔 걸까? 이건 또 왜 여태 버리지 않는 거야?이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람? 06 한참을 그렇게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고래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이런 고래였구나 앞으로는 저런 고래가 되었으면 좋겠어. 어느새 날은 저물고, 고래는 그날 하루를 되돌아봤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지만, 오늘 정말 중요한 걸 한 셈이야. 내가 누군지 조금 더 알게 됐으니까 말이야. 고래는 앞으로도 가끔씩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갖기로 했답니다. 동화작가 신정민은 눈높이아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동안 ,, , 등의 책을 냈다. 민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고래가 있는 민화展 등을 열었다.

201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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