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용사 찾아 세계로… 평택 미군기지서 전시하는 라미 현 작가
굳게 닫힌 문을 열자 캄캄한 병실 침대 위에 환자가 누워 있다. 말할 기운조차 없어 보이는 그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침대 밖을 벗어날 수 없는 환자를 어떻게 렌즈에 담을까? 그때 병실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하얀 지관통이 눈에 띄었다. 아프기 전 그린 작품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작품걸이를 자처한 병원 직원들은 두 팔로 대형 그림을 들어 올렸고 또 다른 작품들은 환자의 담요이자 카펫이 돼 병실 곳곳을 장식했다. 일순간 무채색의 병실은 형형색색 그림들로 가득한 작은 화실이 됐다. 그림의 주인, 표정 없던 그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번진 순간 카메라 셔터가 눌러졌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6·25전쟁 미 해군 참전용사 존 스포포스다. 그는 전쟁 중 우리나라의 도자기를 접한 것이 계기가 돼 고국으로 돌아간 뒤 도예를 공부했고 이후엔 평생 그림을 그렸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작품과 함께 있고 싶다던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뤘다. 라미 현(본명 현효제) 작가가 사진으로 그를 기록한 덕분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노병의 전 생애가 담겼다.

라미 작가는 “그곳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병실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작품을 만들어낸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 작가의 작업실로 표현되길 바랐다”며 “소원을 이뤘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라미 작가는 전 세계 6·25참전용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액자에 넣어 선물하는 일을 한다. 이른바 ‘프로젝트 솔져(project soldier)’다. 지난 7년여간 그의 렌즈에 담긴 이들의 숫자는 2700여 명.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등 국적도 다양하다. 70여 년 전 이국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를 건너온 이들을 만나러 이제는 라미 작가가 먼 길을 거슬러 간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비를 털어가며 이 같은 일을 하는 이유는 뭘까? 대답은 심플했다. 그저 ‘감사함’ 때문이라고. 우리가 공기처럼 마시는 평화가, 애써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그들 덕분임을 아는 까닭이다. 더욱이 외국에서 6·25전쟁은 ‘잊힌 전쟁’으로 불리는 탓에 참전용사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제라도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는 게 라미 작가의 생각이다. 사진 촬영 후 액자 값을 물어오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액자 값은 70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미 작가는 수년간 만난 6·25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제작해 유튜브(@projectsoldier)에 올리고 있다. 수류탄에 맞아 팔과 다리를 잃은 이의 생생한 증언, 눈앞에서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열여덟 소년병의 회고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거슬러 보는 이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라미 작가는 ‘시간의 증언자’들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4월엔 평택 주한미군기지에서 사진전을 열고 그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아이엠 어 솔저(I am a solider)’ 프로젝트가 이 일의 시작이었다고요.
10년 전쯤 육군 홍보영상을 찍기 위해 군인 80명을 인터뷰했어요. 그때 한 원사가 28년간의 군 생활은 자랑스럽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군 생활이 바빠 한 번도 가족과 여행을 가지 못했다는 거예요. 다른 군인들 역시 사정이 비슷했죠. 우리의 평온한 일상은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군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죠.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게 사진을 찍어주는 거였어요.

해외 참전용사를 찾아 나선 계기는 뭔가요?
그간 찍은 군인 사진을 모아 2016년 전시회를 했는데 미 해병대 6·25참전용사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눈빛이 남달랐어요. 자기 나라 전쟁에 참전했던 것도 아닌데 저런 자부심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었죠. 두고두고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아 참전용사들을 찾아 나섰어요. 우리나라에 파병한 나라들 대사관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영국 대사관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고 한 참전용사를 소개해줬어요. 영국에서 만난 그는 한국 청년이 건네는 감사 인사 한 마디에 인생을 보상받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영국군 참전용사협회에도 와달라고 해 한 달 뒤 다시 가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 식으로 계속 여러 인연이 이어져왔죠.

촬영 과정이 궁금해요.
보통 한 분을 촬영하는 데 세 시간 정도 걸려요. 먼저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고 난 뒤 사진을 찍죠. 좋은 장면을 찍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바로 그 순간, 거기 카메라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참전용사들은 어느 순간 70년 전으로 돌아가 있어요. 기쁨, 슬픔, 회한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죠. 저는 그때 셔터만 누르면 되는 거예요. 사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인화해 액자에 담아 전달해드려요.

영상에서 본 그들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워요.
참전용사들이 정말 원하는 건 자신의 이야기가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거예요. 사진 찍어드리고 개인적으로 감사함을 전하는 데서 끝나선 안되겠다고 생각해 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어요. 전쟁 당시 미 참전용사 중 상당수가 10대였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에 6·25전쟁이 발발한 탓에 소년 병사들이 간 거예요. 그들은 낯선 땅에서 동료들이 스러져가는 걸 보면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온몸으로 느꼈죠. 게다가 참전용사 중 30% 정도는 자발적으로 왔어요. 제가 만난 한 용사는 형, 삼촌, 아버지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들은 전쟁을 매우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껴요. 우리나라에 온 것도 ‘남한이 북한의 남침을 받았다니 지켜줘야지’ 이런 마음이었던 거예요. 우리가 공기처럼 누리고 있는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느낄 수 있어요.



라미 작가가 만난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한 편의 소설이자 역사다. 미 육군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한 윌리엄 웨버는 대규모 중공군 공격에 가담했다 한밤중 수류탄에 맞아 한쪽 팔을 잃고 몇 시간 뒤 한쪽 다리마저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나라를 위해 누구나 하는 일을 옆에서 도왔던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영하 30℃ 추위에 떨던 전쟁고아들을 위해 나무로 헛간을 지어 미군기지에 머무르게 해준 이들도 있었다. 당시 열아홉 살의 미 공군 참전용사였던 레스 크롬웰은 70년이 지난 뒤 한국 청년이 가져온 태극기를 보자마자 오열했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며. 라미 작가는 “그간 만난 모든 이들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스스로 ‘영웅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많은 참전용사가 자기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어요. 그들은 진짜 영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요. 게다가 6·25전쟁은 한동안 외국에서 ‘잊힌 전쟁’으로 불렸고 전쟁이 아닌 ‘폴리스 액션(치안활동)’이라고 폄하되기도 했어요. 자부심을 가진 이들도 많지만 전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죠. 2년 전 만난 제이코브 루디는 6·25전쟁 때 전차장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른 탓에 100세 가까운 나이에도 트라우마를 안고 계셨어요. 신기한 건 사진을 찍은 뒤엔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는 게 보인다는 거예요. 스스로 ‘겁쟁이’었다고 말하던 이가 ‘나도 군인이었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달라진 우리나라 모습엔 어떤 반응인가요?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결정된 날, 전 세계 뉴스가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향후 100년간 이 땅에 문명의 빛은 없을 거다’라고요. 전쟁으로 사람들은 죽어 나갔는데 승자도 패자도 없고 서로 땅을 뺏고 뺏긴 것도 아니잖아요. 참전용사들도 허탈감이 컸어요. 그러다 몇십 년 뒤 TV에 나온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고선 충격을 받은 거죠. 저게 서울이라고? 저게 한국이라고?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고 놀랐다는 분이 많더군요.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구나’, ‘대한민국에 우리가 뿌린 자유의 작은 씨앗을 한국인들이 정말 잘 키워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고요.

캠핑카를 타고 참전용사를 찾아다니는 모습도 인상적이에요.
2021년부터 11개월 동안 미국 40개 주를 돌면서 200여 명의 참전용사를 만났어요. 차로 다닌 거리만 5만 5000㎞나 되더군요. 하루 평균 네 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힘들었어요. 카메라, 렌즈, 조명, 프린터기 등 장비만 120㎏ 정도예요. 그걸 계속 이고 지고 다니는 것부터가 엄청난 노동이죠. 그때 자원봉사로 따라온 친구가 “이거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 아니냐”고 하더군요(웃음). 매번 해외에 나가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니 한 번 나갈 때 캠핑카를 렌트해서 여러 곳을 다녀오는 거예요. 매번 ‘한 분만 더…’ 하는 생각으로 버팁니다.

모든 비용을 자비와 후원금으로 충당한다고요.
차도 팔고 카메라 렌즈도 팔아가며 지금까지 해왔어요.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할 때마다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어요. 돈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면 비행기 삯·호텔비·식비 대주는 분들, 이름을 밝히지 않고 3000달러를 후원해준 한인도 있었죠. 지금은 법인을 세워 후원을 받고 있어요. 후원이 있어야 더 많은 분을 찾아갈 수 있어요.

재정적·육체적 어려움 외에 힘든 건 없나요?
지금 이 순간에도 참전용사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 촬영하기로 한 날 아침에 돌아가신 분도 있었어요. 그의 아내와 껴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는 노릇이에요. 아무리 많은 이들을 만나도 90세 가까이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는 다 달라요. 그걸 잘 기록해 남겨두면 10년 뒤, 100년 뒤에도 누군가 볼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집안에서, 한 나라에서 제가 찍은 사진이 역사 속에 계속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영광이죠.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스로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자유는 당연한 권리잖아요. 그런데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쟁취한 것이라는 걸 배웠죠. 또 제가 만난 이들의 이야기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더군요.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 그저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는 거예요. 예전엔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 사는 게 행복인 줄 알았죠. 요샌 우리나라 6·25참전용사를 찾아가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참전용사 마실가다’ 프로젝트도 하는데 어르신 얘기 들으며 밥 한 끼 하는 그 시간이 참 즐거워요. 이젠 그런 일상의 모든 순간이 행복이란 걸 압니다.

조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