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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8년째 살다 보니 말을 하기보다 많이 듣게 된다. 어째서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인지’ 알 것도 같다. 할 말은 많아도 자꾸 혀가 짧아지고, 두 귀는 토끼처럼 쫑긋 세워진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경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도 같다. 남의 얘기를 듣고 두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며 도대체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을 결국 남의 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일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사정이 이러하니 경청은 내일의 희망사항이요, 말로 표현하지 않는 나의 교만은 오늘 나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이를 어찌할까? 아침저녁으로 명상하고, 걷고 또 걸으며 참회해도 쉽사리 귓구멍이 열리지 않는다. 더욱 작아지는 혓바닥마저 돌처럼 굳어간다. 말을 하려고 해도 어느새 혀는 굳어 어쩔 수 없는 묵언이요, 제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귀머거리가 따로 없다.
다시금 돌아보건대 나는 아직 경청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다. 경청이란 그저 남의 얘기를 들어주며 미소짓거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경청은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이지만, 그것은 제대로 들은 뒤 비로소 나의 의견을 분명히 표현하고 상대와 허심탄회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져야만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언뜻 관상을 보고, 대충 얘기를 들어 보고, 기대와 좀 다르다 싶으면 어느새 입을 닫고 귀를 막았다. 말하자면 온전히 한 사람을 이해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며 살아온 것이다. 나 또한 그들에게 똑같이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무리 틀린 말이라 할지라도 깊이 새겨듣지 않고 성급히 내뱉은 말, 이를 어찌 주워 담을까?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은 곧 화가 들어오는 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두 귀는 곧 복이 들어오는 문이 아닌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가? 시시로 두 귀를 파고드는 온갖 진리의 말씀마저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어찌 소리를 보는 관음(觀音)의 경지에 오르겠는가?
다시금 생각하니 나는 아직 나의 숨소리나 심장박동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생을 외면하고 남에게 혹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의 거창한 생을 꿈꾸었다. 모두 귀가 막히고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의 소리는 고사하고 남의 말이 제대로 들리겠는가?
세상을 휘휘 둘러보노라면 도대체 귀는 보이지 않고 나팔 같은 입들만 둥둥 떠다닌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허풍선이니, 그러다 터지면 어찌할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을 바꾸는 힘은 능변이 아니라 경청에 있다. 삶의 아름다운 해답이 바로 경청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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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